음악감독 박 선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스트 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켜준 사람은 다름아닌 아버지였다. 15세때 삭발을 하고 성직자가된 그는 25세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길로들어섰다.
비발디는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기도 했지만 이탈리아인으로써는 드물게 머리색이 붉어서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마침내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가 된 후로두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결코 곱지 않았다. 물론 사제로써의 그의 행실은 문제가 없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에게 붙여진 “붉은 머리 사제 ”라는 별명도 호의 적인 것은 아니었다.
“비발디를 스페인의 투우장에 보내면 힘들게 붉은 헝겊을 휘두를 필요가 없이 머리털만 들이대면 소하고 좋은 대결이 되겠다,” “붉은 머리는 악마의 머리이지 사제에게 걸맞는 머리는 절대로 아니다.”온갖 비웃음과 극언을 참아야 했다.
그는 베네치아에서 피에타 여자 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 했다. 피에타 양육원은 여자 고아들만 모아 보육하는 일종의 고아원으로서 특히 음악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비발디는 실기지도는 물론이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곡을 작곡 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도 하나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유는 주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그는 미사곡, 모테트,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도 다수썼다. 또한 오페라에도 손을 대는 등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초인적으로 창작활동도 해나갔다. 그의 속필은 특히 유명해 전문 사보가들의 사보 속도보다 더 빨리 풀 스코어를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현을 위한 협주곡 만도 400곡을 넘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 마다 특색이 별로 없다는 흠을 남기기도 했으나 뒷날 비인 고전파의 모차르트,베토벤 등에 의해 확립된 독주 협주곡의 선구자 역할을 해냈다는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오페라 흥행에 손을 대고 여가수 안나 지로 와의 연문을 뿌리는 등 사제로써의 의무를 충실히 했는 가의 대해서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그 때문에 빈축을 사 고향에서 쫓겨나다 시피한 그는 각지를 전전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객사해 빈민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 음악가를 알면 클래식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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