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의 난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5/25 [18:50]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5/25 [18:50]
정중부의 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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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의 난은 고려 관료사회의 무반에 대한 홀대에 반발해 일어난 사건으로 이후 백년간 지속되는 무신정권의 시초가 된다. 이 난은 무신들의 권리회복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기보다는 처우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다소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적 사건의 발생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번 벌어지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한다. 이 쿠테타는 오래전부터 잠재되어 왔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고려 광종대 이후 과거제가 정착되면서 고려사회는 문신 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했다. 이 같은 관료체제는 무신의 최고품계를 정3품 상장군에 한정했고 이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무신은 문신출신의 상원수에게 명령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런 관료체제에 대해서 무신들은 그다지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주변국들이 고려와 비슷한 양상인 문신을 우대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고려조정은 대개 정2품의 평장사를 원수에 임명했다. 평장사는 지금으로 치면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재상으로 병권의 최고 책임자를 문신에게 맡긴 것은 자칫 우발적으로 발생 할 수도 있는 무신들의 군사반란에 대한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수행과정에서 발생 할 수 있는 병사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교량적 역할도 있어서 이러한 체제는 적어도 인종 이전까지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고려의 병권구조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인종대에 권력을 독식하던 문신출신인 이자겸이 사병을 육성하여 기형적인 정국운영을 하면서부터였다. 게다가 무신출신인 척준경에게 너무 많은 힘을 실어주면서부터 무신들의 힘이 급성장했다.

게다가 척준경에게 이자겸의 난을 종식시킨 공로로 정2품 평장사 벼슬을 내리자 무신에게 정3품 이상의 벼슬을 내리지 않던 관행이 깨짐으로써 무신들은 광종 이후 오르지 못했던 재상직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발발하면서 무신들의 기가 꺾이고 말았다. 고려의 양반사회는 대개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문반과 서경을 중심으로 하는 무반이 이끌고 있었다.

그런데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의 문반세력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자 결과적으로 서경세력이 약화 되었고 결국 무반들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이때부터 개경의 문신세력들이 무신들을 멸시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의종대에 이르러 왕이 일부 문신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무신들을 무시하는 경향은 더욱 짙어졌다.
 
의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상장군에 오른 정중부였지만 의종이 사흘이 멀다 하고 연회를 베푸니 자신이 호위병을 대동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연회가 며칠씩이나 지속되기라도 하면 호위병사들은 굶주린 채 추위나 더위를 참아가며 경비를 서야만했다. 이런 일에 계속되자 호위병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었고 마침내 정중부 이하 장수들이 반란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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