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의 난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09/05/18 [12:4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5/18 [12:48]
정중부의 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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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청의 난 이후 개경의 문신귀족들이 정권을 장악한 가운데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로 20세의 나이로 고려 18대 왕위에 올랐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겨 학문을 소홀히 하자 모후인 공혜왕후는 둘째 왕자를 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예부시랑 정습명이 태자폐립을 반대하며 자신이 의종을 보필하여 정사를 원만히 수행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여 가까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의종 즉위 후 한림학사로 승격한 원칙주의자 정습명은 의종을 냉정하게 보필하며 정치 전반에 관한 자문역을 수행했는데 그가 너무 지나치게 왕의 행동을 규제하는 바람에 의종이 점차 그를 꺼리게 되었다. 결국 의종이 환관과 내시(사무직)들을 중심으로 한 근위세력을 형성하여 정습명을 정계에서 축출하여 죽여 버렸다.

의종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을 회복하려고 환관과 사무직으로 종사했던 내시들을 중심으로 친위세력을 형성하였다. 왕은 이들을 왕실에 관련된 농장관리 같은 재산 증식이나 각종 정보수집 그리고 사적인 심부름 등에 이용했다. 게다가 이들은 귀족 가문이 아니므로 출세하는 길은 왕과 가까이 하는 길뿐이었다.

의종 초에는 인종대의 공신인 김부식 등 개경의 문신귀족세력이 정권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이미 국왕의 권력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의종은 이들 문신들이 왕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규제를 하자 환멸을 느끼고 이들에 대한 반발로 환관과 내시들과 어울려 매일같이 격구나 수박희(태껸)를 즐기며 정사를 등한시했다. 이러는 가운데 반역사건이 이어지자 문신들의 강력한 항의에 밀려 할 수 없이 환관과 내시 등을 유배시켰다.
 
그러나 의종은 다시금 근위세력을 형성하여 자신의 행동을 철저히 규제하며 대관들의 상소를 주도하던 문신들을 삭탈관직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이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문신들은 그냥 두지 않겠다는 결의였다. 그리고는 그동안 즐겨했던 격구를 포기하는 대신 자주 주연을 베풀었다.

주연이 펼쳐질 때마다 정중부를 비롯한 무인과 병사들은 주변을 경계해야 했는데 주연이 길어지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 의종은 이들 무장을 달래기 위해 택견시합을 벌여 우승한 자에게 상을 내렸지만 무장들은 늘상 문인들로 하여금 무식한 놈들이라고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의종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질수록 권력은 환관과 재시들의 차지가 되어 의종후반기 정치는 이른바 ‘환관정치’가 되고 말았다. 특히 그들의 우두머리인 정함과 백연선은 왕의 신임을 믿고 기고만장하여 백관을 눈짓으로 부리고 무장들을 종 부리듯했다.

이처럼 정사가 엉망이 된 1167년 연등회 도중에 김부식의 둘째아들 김돈중이 부리던 말이 기마병의 화살통을 들이받아 공교롭게 화살이 왕의 가마 옆에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의종은 자객이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황급히 궁성으로 돌아와 계엄령을 내리고 범인을 잡으라고 재촉하자 별다른 증거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으며 호위병들은 근무태만의 책임을 물어 14명이 귀양길에 올라 무장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도 의종은 호위병들의 고초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3일에 한번씩 연회를 베풀었다. 호위병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되어 갔고 마침내 반란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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