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화가로 기억되고픈 사람 - 김순겸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9/03/24 [15:18]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9/03/24 [15:18]
언제나 화가로 기억되고픈 사람 - 김순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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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 김순겸     © 주간시흥신문
인터뷰를 작정하고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맘은 설렌다. 지난 시흥축제 때 벚나무 아래에서 만났던 그의 작품들이 떠올라서이다. 사진작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줄을 지어 선 문인들의 시가 그의 작품과 함께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눈길을 앗았다. 특유의 깔끔한 색채가 눈에 들어와 달리 화가를 묻지 않고도 짐작이 가는 터라 반가움이 컸었다.

은행동 택지지구 안. 그의 작업실을 찾았더니 ‘허걱’ 이사를 했다네. 당연히 알고 있다고 입막음을 한 탓에 작업실 이전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잘못이 컸다. 막바지 더위에 되돌아오는 걸음은 처음과 달랐다. 막상 승용차를 이용해 계수동에 있다는 그의 작업실을 찾아 나서니 창을 통해 들어오는 10월의 바람이 상쾌하다.

계수저수지 입구의 온통 하얀색 건물에 시선을 끄는 색선이 가배얍게 날고 있는 건물 2층이 그의 작업실이란다. 시흥미술협회 부지부장 김순겸(51)씨. 그의 작업실은 막 정리가 되어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튼 모습이 역력했다. 새로운 작품 준비로 분주한 그를 붙잡고 지난 작품들 속에 드러냈던 기억너머 그리움을 풀어내 그의 흔적을 돌아봤다.

“시흥 주변만 돌다가 결국엔 시흥에 자리를 잡았지” 후회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는 그는 고향이 남들보다 많다. 당시에는 고생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큰 그리움이 남는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 대전 근교 시골이었다. 그림이라면 남의 얘기로 알았던 두메산골의 살림. 도시에서 그림을 그리는 친구가 6학년 때 전학을 왔다. 그를 통해 그림이란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재미가 생겼다. 자신감이 붙었다.
 
재능이 아주 없는 게 아닌 듯 했다. 하지만 부모님을 좇아 떠난 제주도의 생활은 그를 서정적인 세계로 몰아갔다. 끝없는 바다와 마주하고 눈물짓던 시간. 중학교 미술부 활동으로 일 년간의 방황이 끝나고 그림 세계로 들어선다. 막상 고교 진학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니 바로 대학으로 이어지고 결국엔 공부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접었던 붓을 다시 들게 된 것은 육군사관학교 입학의 목표가 좌절되고 난 뒤의 선택이다. 대학원에 가서 미술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그의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 것은 졸업 후 곧바로 이어진 교사 발령이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대학원 진학을 희망했다. 하지만 참교육을 외치며 전교조 활동에 발을 들여 놓고 보니 생각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

동분서주 했던 순간에 머리를 앓았다. 병명도 없는 두통과 함께 그의 몸은 사그라져만 갔다. 그림을 접은 것이 원인이라는 친구들의 진단에 따라 그림을 그렸고 개인전도 열었다. 민중미술이라는 테마 아래 그린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칭찬을 받았지만 전시회의 폐막과 함께 그에게 공허함이 찾아왔다. 서정적인 편안함으로 가지 않고 소외된 인간을 중심으로 잡은 탓이라 여겼다.

때마침 미술계 저명인사가 찾아와 그림의 변화를 조언했다.
작품의 변화는 쉽지 않았지만 가속도가 붙었다.
대중들도 이해하고 예술성도 인정받을 수 있는 중용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인간에서 자연으로, 자연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기억너머 있는 그리움과 결국엔 행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 천혜자연을 지닌 시흥에서의 활동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교단을 떠나 전업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시흥지부를 찾아 가입을 했다. 이것이 시흥미술협회와의 첫 만남이다.
그 때부터 사무국장과 부회장 직분을 맡아 협회의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다. “삶의 여유를 주는 자연 친화적 도시인 시흥에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애향심 많은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는 그는 그래서 미술 동호회를 조직했다.
 
이름을 공모하여 선택된 ‘시월화우회’는 그에게 수업을 받았던 수강생들이 모여 만든 동호회다. 그들과 함께 야외스케치를 나서보면 시흥의 변화가 눈에 들어와 안타까울 때가 있다. 공장이 구석구석 침투하니 자연부락의 풍광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다. 환경의 변화만큼이나 안타까운 건 개선되지 않는 전시장과 공연장의 부재다.

“수준 높은 공연과 전시를 보여줄 때 시민들도 정주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말에 공감 100%다. 지역미술 문화에 관여하면서 쓴 소리도 하고 욕먹기를 서슴치 않고 있지만 “프로집단인 미술협회가 전문의식을 가져야 한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지역 미술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누군가 나서서 질을 높여야하고 분위기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는 그. 희망이라면 질 높은 작가들이 타 도시로 이주하지 않고 시흥에 포진하여 오래도록 활동했으면 하는 것이다.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 단맛과 쓴맛을 보며 달려 온 길이지만 막상 그림을 찾는 이가 늘어나니 정작에 접어야 하는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작품에 몰두하다보니 그동안 나갔던 수강생 지도 수업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동호회 활동을 도와주는 것은 더더욱 힘들어졌다. 하지만 직접적인 지도만이 방법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끊임없는 관심과 신경으로 살필 요량이다. 그리고 아카데미 지도만이 문화 예술 활동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을 내어 역량 있는 작가가 되는 것도 지역발전에 이바지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업 작가의 시작도 시흥이고 자신의 꿈을 펼친 곳도 시흥이니 영원한 시흥의 문화인으로 남고 싶다.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는 미술사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타 지역 작가들이 시흥을 찾게 만들고 싶다.

“잘 그렸다는 그림 평보다는 작품을 보면서 열심히 했구나 하며 열정과 정성을 봐 주기를 바란다.”는 그.

안주하지 않고 더 큰 꿈을 키워 나가며 시흥을 대표하는 작가로 남고자 노력하는 것이 곧 시흥미술 발전이라는 그의 거듭된 주장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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