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중부 전선 아래 백로들이 참새 때 보다 많은 천혜의 자연이 숨 쉬는 철원.
그러나 밤 낮 없이 들리던 확성기 소리가 이제는 조용해지고 가을 벼 이삯을 거두는 길가엔 코스모스길 풍경이 살아있는 우리를 숨 쉬게 하고 있다.
18살 춥고 가난했던 고향 강원도 철원을 떠나 30여 년 동안 한 계통 한 우물만을 끊임없이 파왔던 통일중전기 김 갑용 대표.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엔 늘 미소가 함박 가득 차 있다.
전기 배전반 한 가지 아이템으로 그의 일관되고 소리 없는 사업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처음부터 수전 받을 때까지 설계도에 의해 수작업으로만 제조하는 사업이 편할 수 없지만 하늘이 주신 직업으로 여기고 중전기 업계에서 기술을 축적한 것과 현장 노하우를 바탕으로 93년 통일중전기는 사업을 전개한다. 통일중전기라는 상호를 만들게 된 것은 아버님의 영향이라고 했다. 강원도 통천 출신인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어릴 때 자주 들었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이라는 노래를 자신 의 상호로 만든 것이다. 어렵게 시작한 개인 사업이지만 직원들을 내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연구 개발에 직원들의 땀방울이 맺힐 때쯤 기술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조그만 건물에서부터 시작한 배전반 설치 작업은 이후 홍천의 대명콘도스키장을 발판으로 대형프로젝트 사업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96년도에 사업장을 시흥으로 이전하고 사업 확장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IMF시기 99년 끝자락에 결정적인 부도를 맞기도 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가던 그에게 커다란 시련이 닥친 것이다. 당시 살고 있던 집을 처분하고 어려운 상황을 잘 모면 하면서 극복해 나가던 중 회사 상호가 계기가 되어 평화재단에서 통일 문구가 들어간 회사를 섭외하다 전기조합에서 통일중전기와 평화재단 그리고 북한과의 교류가 극적이며 이색적으로 연결 된 것이다.
2000년에는 드디어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남북 평화 무드가 조성 되면서 평화재단이 평양에 평화자동차공장을 설립하면서 사업은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평양과의 직접 교역은 아니지만 평양에 자동차 공장을 가진 평화재단과의 거래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몇 차례에 걸쳐 평양을 오가며 대형 전기 배전반을 납품하고 설치하는 일을 하며 북한과 교류하는 기업인이 되었다. 이러한 납품의 인연은 초등학교 시절 돌아가신 아버지가 가보시지 못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자식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주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배전반 설치와 이와 관련된 업무를 진행하고 있으면서 그곳 사람들과 많이 접촉하게 되는데 아직도 폐쇄적이고 일그러진 그들의 삶에 변화를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들도 이제는 남한 제품이 품질과 성능 등에서 최고의 제품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며 남한에 대한 그들의 많은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근래 개성공단 등 남북 교류가 활발해 지고 있는데 현지사정을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기업 진출이 성공할 수 있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는 “변화를 두려워했던 그들이지만 모든 환경에서 낙후된 북한에 현지에 맞는 다양한 경제협력을 통해서 변화를 준다면 50년후 에는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체제와 여건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내수 사업으로는 한국전기 공업협동조합에 단체 수의 계약을 통해 각종 배전반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한국 전기연구소와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사업을 전개 중이라는 김 대표는 그동안 자신의 활동 때문에 제일 힘들어 했던 아내에게 미안하다며 지금은 남편의 모든 일에 제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지지해주는 부인과 가족을 제일 소중한 사람으로 꼽았다.
김갑용 대표는 지금현재 중전기 업계의 어려운 사정을 대비하여 한강 라이프 상조회라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여 지금껏 구축해놓은 신뢰와 믿음으로 많은 회원확보와 새로운 상조문화의 리더로서도 자리 매김 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사업에 빠져 있던 그에게 한 가지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 것이 바로 축구라고 했다. 그중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포크레인과 함께 김 대표의 부인이 나타났다. 축구에 미쳐있던 김 대표에게 앞으로 축구를 하면 운동장을 모두 파 헤쳐 놓을 것이라며 눈물로 호소를 했다고 한다. 축구에 미쳐 있던 김 대표는 그때부터 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안산에 88년에 이사 와서 이곳 시흥 정왕동에 96년 입주하여 살아가며 초기 시화지구 입주민들의 화합을 위해 생활조기축구단을 만들며 축구를 통한 시흥 축구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한 김 갑용 대표는 시흥시 강원도민회를 김명동회장과 더불어 창립을 하며 시흥에서 강원도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정왕동 46블럭에 있는 강원도민회 사무실을 거의 매일 찾는다는 김 갑용 대표는 “지역사회와 유관단체에서 기피하지 않는 모범적으로 도민회를 이끌어 가기위해 지역봉사활동에 치중을 하며 활동하는 등 시흥이 밝고 건전하게 내 고향처럼 살 수 있게 하는데 일조를 하겠다.”고도 밝혔다.
김 갑용 대표는 강원도와 시흥이 동·서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역으로 자연과 같은 깨끗하고 온순한 정겨운 사람들의 결집된 지역이 될 수 있도록 강원도민회에서 다양한 교류의 서포터즈 역할을 할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남의 눈에 눈물 흘리지 않게 행동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겠다. 며 오늘도 소외된 이웃을 찾아 나서는 그의 발길은 무척 가벼워 보인다.
[주요 약력]
- 냉정초등학교 운영위원(전)
- 시흥시 축구연합회 수석부회장 및 경기위원장(전)
- 정왕3동 체육회 이사(전)
- 재) 시흥 강원도민회 수석부회장(현)
- 민주평통 자문위원(현)
- 시흥 카네기 자문위원(현)
- 시흥시 축구연합회 2지부 고문 (현)
- 통일중전기 대표(현)
- 한강라이프상조(주) 시흥·안산 지사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