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에 미쳐야 사는 정열의 사나이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9/01/06 [19:48]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9/01/06 [19:48]
좋아하는 것에 미쳐야 사는 정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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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흥시 생활체육 테니스연합회
                         회장  이만근
시골에서 미꾸라지를 잡으며 산에서 땔감을 마련하고 텃밭 농사를 짓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고향은 서울 태릉.
당시 농사를 짓던 아버님이 12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시자 중학교 입학금을 들고 돈을 벌겠다며 친구와 함께 가출 아닌 가출을 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어느 순간 친구들과 함께 다시 공부를 하자며 찾아간 곳은 돈 안들이고 다닐 수 있던 고등공민학교.
누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 하자면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을 더듬지만 오늘의 주인공 이만근 회장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대견했다고 말한다.

스스로 벌어서 학교를 마치고 또 상급 학교는 다시 벌어서 가는 남들 공부할 때 돈 벌고 남들 돈 벌 때 공부를 하며 조금은 특이한 청소년기를 보냈던 이만근 회장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우유 배달, 신문 배달 등으로 깨달은 부(富)의 가치가 사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만근 회장의 청소년기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준 버팀목이 되는 큰 역할을 해 주었고, 대학을 마친 이후 입사한 재현전자는 기업인으로서 초석을 만들게 해주었다. 당시 LCD부품을 만들던 회사에서 10여년을 근무한 뒤 퇴직금 3천만 원과 기계 1대로 시작한 태성전자는 2006년 300만 불 수출 탑을 수상하는 발판이 되었다.

직원 1명으로 시작한 사업은 7년 만에 200명의 직원과 함게하는 회사로 성장했고, 비록 회사 규모는 작고 국내에서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일본, 대만, 중국에서 브랜드 가치를 올리며 지속적인 성장을 했다. 기업이 급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어렵게 자랐던 환경에서 몸소 체험으로 익힌 이 회장의 부지런함과 시장 변화에 따른 미래 예측을 했기 때문이었다.

LCD시장 초기 당시 국내 시장의 큰 손 삼성과 LG에서는 값비싼 LCD제품을 만드는데 대부분의 부품을 수입하여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 회장은 부품의 국산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기술개발에 전념을 한 결과 국산화에 성공을 하게 됐다. 그러나 국산을 신뢰하지 못하는 대기업에 납품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가의 LCD에 저가의 국산 부품을 사용하다 낭패를 보지 않으려는 대기업에 꾸준한 품질 테스트를 통해 결국 수입에 의존해오던 부품을 대체해 태성LCD의 부품을 인정하게 됐다. 지금은 95%이상 국내 부품을 사용하는 단계가 되어 막대한 외화를 유출시키지 않는 한편 전 세계 시장의 40%이상까지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도 했다. 이처럼 ‘작지만 강한 회사’ 태성LCD의 초고속 성장에 수많은 회사들이 LCD부품 시장에 뛰어 들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자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며 제2의 도약을 갖출 필요를 느끼던 중 두산그룹에서 선의적 M&A를 제안 해왔다.

기업 경영을 통째로 넘겨달라는 제안에 마음의 고통을 인내하며 고민하다 대기업의 계열사가 되어 그동안 자신이 키워온 회사와 직원들의 복지 향상과 미래를 위해 과감히 종업원들의 의견을 개진해 회사를 두산 네오플럭스에 넘기게 되었다.
 
그러던 그에게 수없이 밤을 지새운 마음의 고통과 허무한 마음을 달래 준 것은 테니스였다. 건강이 좋지 않던 90년도 어느 날 부인이 생일 선물로 사준 테니스 라켓을 받아들고 시작한 그의 테니스 인생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테니스 때문에 사업도 제대로 못할 뻔 했고 직장 다닐 때는 어떻게 하면 테니스를 칠 수 있을까 고민하며 남 몰래 레슨을 받으며 매일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한 테니스를 이만근 회장은 “테니스는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자신은 사업보다 애경사 챙기는 것과 테니스 치는 일에 미쳐있었다.”라고 말하는 이 회장은 이로 인해 부인과 많은 갈등을 빚기도 할 정도였지만 테니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이렇게 시작한 테니스는 2005년 시흥시 테니스협회장을 맡으며 더욱 테니스에 관한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니아가 되었다.
이만근 회장에게 테니스의 장점을 말해달라고 하자 그는 “몸이 아프고 몸살이 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이나 약국을 찾지만 저는 테니스코트로 갑니다.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테니스를 치고 나면 오히려 사우나 가는 것보다 개운하고 감기 몸살도 도망을 갑니다.”라며 인터뷰 기자에게도 테니스를 권했다.

이 회장은 테니스협회 수석부회장을 4년 동안 역임한 경험으로 테니스 동호인들의 소망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새로이 시작한 테니스협회 회장직은 새로운 열정이 필요했다. 물론 그동안 역대 회장들이 협회를 잘 이끌어 왔지만 시흥시 전체 동호인들을 하나로 묶어 화합을 이루는데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협회 운영진을 소외된 지역 사람들을 많이 임명하고 신천권에서만 치러지는 행사를 정왕권과 번갈아 가며 진행하자 동호인들의 반응이 점점 좋아지게 되었고 이제 모든 행사에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잘 융화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또한 지도자 양성 문제에 있어 코트와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지도자의 생계문제로 인해 각종 불협화음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협회 규정과 포괄적 규정을 적용해 능력이 부족한 지도자는 과감하게 정리하고 함께 새로 선임된 지도자에게는 스스로의 마인드를 다지게 한 후 긴장감을 더할 수 있도록 했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고르지 못해 레슨을 받지 못한 수강생들에게는 토·일요일을 활용하여 보충 교육을 하게 하자 레슨자들이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열악한 동호회를 활성화 시키며 시흥 테니스의 분위기를 한층 업그레이드 시켰다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성적보다는 동호인 화합으로 치루는 각 종 대회는 잔치 분위기로 이어져 지금 등록 동호인 700여명의 적극적인 호응과 더불어 시흥 테니스가 전국 테니스를 리더 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다.
90년대 중반 회사에 찾아오는 외부 거래처 손님이나 일부 택배가 서울 시흥동으로 가는 일이 잦아 사업에 지장을 받고 시흥의 대외 인지도가 낮다는 점을 안타깝게 여겨 시흥의 홍보를 위한 길을 찾다 운동과 사업을 하는 친구 3명이 모여 시흥에서 전국대회를 한 번 개최 하자는 결심을 하고 ‘시흥717배 전국테니스대회’를 열게 되었다.

717대회는 한 여름 7월 17일 국경일에 열리는 대회로 첫 홍보를 위해 자비를 들여 전국을 누비며 포스터와 각 종 홍보를 통해 첫 회에는 200여명이 참가했으나 지금은 1군 대회로 승격되면서 전국에서 총 600여 개 팀 1천2백 명이 참가할 정도의 명실상부한 전국대회로 성장했다. 이처럼 시흥을 전국에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시흥 테니스의 리더 이만근 회장은 “우수한 인재들이 중·고생이 될 때 타 지역으로 유출되고 가족이 함께 이주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하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흥시 교육청 교육위원과 안산검찰청 청소년범죄예방위원이기도 한 이 회장은 청소년들의 선도와 지도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앞으로 시흥의 미래는 성장하는 청소년들이 이끌어갈 20~30년 후의 대계를 잘 설계하여 정리 정돈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시흥을 물려줘야 한다.”며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테니스 동호인들에게는 “테니스는 최고의 고급 스포츠이며 신사적인 스포츠로 침체된 상황이지만 협회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호인들에게 감사하다”며 크게 “파이팅!”을 외쳤다.
 
♣ 주요경력
- 시흥시 교육청 교육위원회 상임위원
- 동아시아 경제인회의 조직위원회 위원
- 시흥시 사회복지협의회 이사
- 시흥시 생활체육 테니스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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