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불전쟁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10/01 [11:38]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10/01 [11:38]
청불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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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유럽 열강들은 중국을 분할하려고 획책하는 전쟁은 이미 시작되어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얻은 홍콩을 기점으로 상해와 천진 등 주로 동남쪽 개항장에 발판을 만들어 들어가려고 하고 러시아는 동북쪽에서 서북쪽에 걸친 국경선에서 남하하려고 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는 안남(베트남)을 기지로 삼아 중국의 서남쪽인 운남쪽에서 침투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침략은 항상 카톨릭 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 명분으로 1858년 안남에 출병했다. 북경 원명원의 약탈에 참가한 프랑스군 3천5백 명이 청국에서 안남으로 보내졌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안남 정부는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일파중 하나인 유영복에게 원군을 청하자 유영복이 이끄는 흑기군은 1873년 12월 하노이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프랑스가 하노이를 재점령하고자 1882년 다시 군사를 일으키자 이듬해 5월 안남군과 흑기군은 치키에우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여 이 전투에서 프랑스 사령관 리베에르가 전사했다.

그러자 프랑스는 의회는 12월에 추가 군비와 1만5천명의 증원군을 승인하고 프랑스 원정군 총사령관 쿠르베 제독을 앞세워 압도적인 무기와 병력을 앞세워 손타이, 바쿠닌, 타이구엔, 훈호와 등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고 손코이강의 델타지방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안남정부가 청국정부에 구원을 요청하자 청국은 안남 지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생각보다 전쟁이 지루하게 시간을 끌자 신강지방에서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계속해서 군사행동을 벌인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한 이홍장은 1885년 5월 프랑스 대표 푸르니에와 천진에서 만나 간명조약(수호선린에 대한 가조약)을 맺어 안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청국군을 국경선까지 철수한다고 조인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안남조약을 조인한 후 국경선까지 철수한다는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로청국군에 공격을 가했다. 조약에는 분명히 국경선까지 철수할 것을 약속했지만 기한에 대해서는 특별히 정한바가 없어서 이 부당한 공격에 대해 청국군이 반격을 가해 프랑스군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측은 2억5천만 프랑의 배상금과 청국군 즉시 철수를 요구하여 청국이 철수 준비를 하는 동안 프랑스 함대는 북주의 미미군항을 공격하여 복건수군을 전멸시키고 중국 최대의 미미조선소를 파괴했다.

복건수군이 전멸한지 3일 후 청국이 프랑스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자 복주를 습격한 프랑스 함대가 대만에 상륙하려 하다 실패를 하자 해상봉쇄를 감행했다. 다음해인 1885년 3월 절강 연안에 침입했으나 해안포대로부터 포격을 당해 제독 쿠르베가 부상을 입고 6월에 평도호에서 죽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안남에서는 잡군 출신인 노장 풍자재가 프랑스군에 맹공을 가해 란손을 점령하자 프랑스군 사령관 데그리에는 중상을 입고 프랑스로 패주했고 섭주전선에서도 흑기군이 프랑스군을 격퇴했다. 이 불명예스러운 전쟁의 패전으로 인해 프랑스 본국에서 페리내각이 실각했다.

1885년 3월 31일 유럽에 가있던 증기택은 이홍장에게 전보로 화의를 진행시킬 호기로 판단한다고 알려와 이홍장은 이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와 강화를 성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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