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8/31 [12:46]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8/31 [12:46]
서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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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1780년(정조4) 박명원이 청나라 사신으로 임명되자 박명원은 친척 동생인 연암 박지원과 박래원을 수행원으로 동행하여 중국 여행길에 올랐다. 이 여행길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유명한 열하일기이다.

연암 일행은 정해진 조공길을 따라 북경에 도착했으나 청나라 황제인 건륭제는 열하의 별궁에서 머무르면서 생일잔치를 한다고 통보를 해와 연암 일행은 조선의 사신들이 한 번도 가지 못했던 열하산장을 방문하는 행운을 얻었다.

열하라는 지명은 주변에 온천이 많아서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데서 유래된 곳으로 건륭황제가 피서산장이라 이름 붙인 후 청나라 역대 황제들이 매년 이곳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정사를 보았던 곳이었다.

열하산장은 강희, 옹정, 건륭 3대에 걸쳐 90년 가까운 세월을 들여 완성한 피서산장으로 원래는 황제가 북쪽 변방으로 사냥을 떠날 때 잠시 머무르는 행궁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열하일기 덕택에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이 열하산장에 천진조약의 비준을 이유로 쳐들어온 영불 연합군에 쫓겨 1860년 함풍제는 허겁지겁 도망쳐왔다.

이곳으로 도망쳐온 그 다음해인 1861년 함풍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동치제가 6살의 어린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동치제는 실제 정사를 볼 수 없어 수렴청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함풍제의 정비인 동태후와 동치제의 생모인 후궁인 서태후가 함께 섭정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글을 모르는 동태후가 자신은 글을 모르니 정사에 대해서는 알아서하라고 서태후에게 일임을 하여 청나라의 모든 권력은 서태후의 손아귀에 들어가 당나라의 측천무후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는 여걸이 탄생했다.

원래 서태후는 서열이 낮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동치제를 낳았기에 정비인 동태후에 버금가는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함풍제가 죽어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1873년 이후 섭정은 끝났지만 권력은 계속해서 장악하고 있었다. 동치제가 무절제한 생활로 건강을 해쳐 1875년 사망하자 황위계승서열을 무시하고 자신의 여동생의 3살밖에 안된 아들을 양자로 삼아 제위를 계승하게 한 뒤 반대파는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실질적인 청나라의 마지막 권력을 휘두른 황제인 광서제는 1898년 27세가 되자 서태후에 반대하여 개혁세력과 손을 잡고 중국을 개혁하려 했으나 서태후의 군사력에 밀려 유폐되는 신세가 되었다.

1908년 11월 15일에 서태후가 죽었고, 매우 미심쩍게도 그때까지 건강하던 광서제가 바로 전날에 죽었다고 공표되었다. 서태후의 마지막 포고로 광서제의 3살 난 조카에게 황위가 넘겨졌고, 새로운 황제는 선통(宣統)이라는 연호로 즉위했다. 이 황제가 청나라 마지막 황제인 부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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