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과 만리장성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7/06 [14:38]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7/06 [14:38]
진시황과 만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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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일 편집위원    

기마민족인 유목민이 만주와 몽골 그리고 남러시아 지역을 활개치고 다닐 때 중국은 황하강 유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농경민족이었다.
이런 중국의 한(漢)족이 중국대륙을 통일하고 주변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시기는 바로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부터였다.

주나라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서주시대의 끝자락에 각 제후국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가던 시기가 춘추시대이고 왕으로 자처하며 약한 나라를 병합해가던 시기가 전국시대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백성들은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하던 시기에 진나라의 진시황이 나타나 전국을 통일했다.

동양의 폭군으로는 진시황 서양의 폭군은 네로라고 알려 질만큼 폭군의 대명사인 진시황이었지만 이는 후세의 사가들이 붙여준 오명이었고 실제로 진시황은 현대까지 활용 될 만큼 뛰어난 국가체제를 완성한 사람이었다.
진시황은 공자가 이룩해 놓은 유학을 매우 싫어해서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사건을 통해 유학을 말살하려 했기 때문에 후일 정권을 잡은 한나라의 기본 이념이 유학이었기에 유학을 공부한 학자들에 의해 폭군으로 규정되었으며 로마황제 네로는 기독교도를 경기장에서 처형한 인물로 후일 기독교가 중세를 지배했을 때 기독교에 입각한 사가들에 의해 폭군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은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늘어났으며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기술 또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진시황이 북방에 만리장성이라는 거대한 장성을 쌓게 된 이유는 중국내의 통일은 이룩했지만 북방의 유목민에 대한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유목민의 특성상 말을 타고 질주하는 그들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장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무리를 하면서까지 장성축조를 감행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소망에도 불구하고 만리장성을 쌓기 위해 동원한 가혹한 노역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반발로 인해 통일된 진나라는 결국 망하고 말았으며 훗날에도 여전히 북방 유목민의 침략을 두려워하며 살아야만했다.

이 유목민들 중의 한 갈래인 한(韓)족이 바로 우리나라의 선조들이며 통일된 중국에 밀려 한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이른바 중국의 혼란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에 관해서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기에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는 반면에 이 시대의 우리들의 조상에 관해서는 삼국유사 편에 설화처럼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전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료들이 전해지지 않고 있어 중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규명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요즘 들어서 젊은 사학자들이 우리들의 고대사를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사료와 유물의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다행히 한단고기라는 책이 발견되어 고조선의 비밀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지만 앞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지만 그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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