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국과 재상정치

편집위원장 칼럼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4/14 [16:15]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4/14 [16:15]
조선의 개국과 재상정치
편집위원장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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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호족의 딸들과 결혼을 했는데 그 수가 무려 29명이었다. 왕과 인척관계를 맺은 지방 호족들은 함부로 중앙정부에 대들지 못했지만 그만큼 혜택도 많이 받아 귀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농민들은 각종 세금에 허덕이다가 결국은 땅을 팔고 귀족들의 농장에서 농노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 말기에 이르러서는 농지의 대부분이 사찰의 소유지이거나 귀족들의 농장소유가 되어 국가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역대 왕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타파하고자 여러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귀족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공민왕이 등극하면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신돈을 등장시켰다. 신돈은 사원과 귀족의 토지를 거두어 본래의 농민들에게 돌려주고 귀족의 노비로 양민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두 풀어주었다.
여기에 땅을 빼앗겨 불만을 품은 불교세력들과 귀족들은 서로 합심하여 신돈을 실각시키고 공민왕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전통적 귀족층과 세상을 개혁하려던 신진관료와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고 말았다. 이들의 대립은 급기야 고려를 멸망의 길로 이끌고 말았다.
신진관료들은 타락한 불교 이론으로는 국가를 회생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송나라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여 국가개혁을 시도하려했는데 이들은 또한 고려에 새로운 기풍을 몰아넣으려는 쪽인 온건한 개혁파인 이재현, 이색, 정몽주 등과 고려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려는 역성혁명파인 정도전, 조준, 윤소중, 이성계 등으로 나누어지고 말았다.   이들의 세력다툼에서 승리한 역성혁명파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문제는 정도전의 사상으로 그는 재상이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 재상이 실권을 잡고 정치를 해나가기 위해서는 장성한 왕자는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첫째부인이 낳은 장성한 아들들을 제외하고 둘째부인인 신덕왕후의 소생인 제일 나이어린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자 조선의 건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워온 첫째부인 아들들이 반기를 들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넷째 아들인 방원이 실권을 잡게 되었다.
이로써 정도전이 꿈꿔온 재상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어 왕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도전의 사상이 미친 여파는 그 후로 계속 전해 내려와 조선왕조는 왕권과 신권의 격전지가 되고 말았다.
영특한 왕이 등극하게 되면 왕권이 강화되는 것 같다가도 영특하지 못하거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왕이 등극하게 되면 신하와의 갈등을 겪게 되는 것이다.
신하와의 갈등을 잘 소화한 왕은 그래도 왕권은 유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연산군이나 광해군 같은 왕은 왕위에서 쫓겨나는 일마저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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