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숙의 사진집 ‘나의 살던 고향은’

택지개발로 사라져가는 시흥의 자연마을을 사진에 담다.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5/01/12 [16:3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5/01/12 [16:39]
최영숙의 사진집 ‘나의 살던 고향은’
택지개발로 사라져가는 시흥의 자연마을을 사진에 담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 주간시흥

 
나의 살던 고향은 충청도 깊은 산 골짜기, 버스에 내려서 한참은 더 걸어 들어 가야하는, 구비구비 돌고돌아 다리가 아파올 때 쯤 나타나는 깊은 산 중이었다. 현재는 살던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어 도회지로 나가고 고향을 지키던 노인들은 모두 돌아가시거나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터전을 옮겨 아무도 살지 않는, 할아버지의 무덤만이 옛 기억에 쓸쓸함을 더한다.
고향은 언제나 마음속에 자리 잡고 깊은 추억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게 한다.

세상은 언제나 변화를 요구한다.
옛 말에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2015년은 일 년 후의 모습조차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온다. 장현, 장곡지구개발, 목감지구개발, 은계지구 개발, 배곧신도시, 시화 MTV사업 등 굵직한 사업들로 인해 시흥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가고 있다.

10년 동안 고향의 변화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온 사진작가 최영숙의 사진집 ‘나의 살던 고향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올 겨울은 포근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겨울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을미년 새해 첫 인터뷰를 하기위해 근처 카페를 찾았다.   

“사라지는 풍경을 사진에 담는 일은 깊은 쓸쓸함을 동반했다.”는 작가는 2004부터 2014년 까지 딱 10년을 택지개발로 사라지는 시흥시의 자연마을들을 사진에 담았다.

언제부터인가 사진으로 기록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는 작가는, 2004년부터 안두일, 박두일, 둔터골, 을미, 묘제, 수노골, 은행정 마을 등 시흥시에 남아있는 자연부락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2008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그야말로 밤낮없이 사진기를 들고 헤매 다녔다.

그나마 변화의 바람이 비껴간 자연부락이 이때를 기준으로 본격적인 개발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개발되기 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마음먹으니 더 급해져 찍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밤중은 물론 새벽에도 마다않고 돌아 다녔다. 때에 따라 변하는 빛이 궁금하기도 하고, 갑자기 지금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증이 들면 차를 타고 이동해 바로 셔터를 눌렀다. 한편으로는 보상이 끝나고 나면 모두 이사를 하기 때문에 마음이 더 조급하기도 했다. 

가방 메고 카메라 들고 마을을 들어가면 "고참, 맹랑하게 혼자서 그러고 다녀." 하면서도 다정하게 맞아주는 마을 어른들의 모습들이 저장된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 혼자 웃곤 한다.

▲     ©주간시흥

이번 사진집에는 마을 어른들의 모습들이 많이 담겨있다. 모두 우리네가 살던 마을의 흔적이고 정겨운 얼굴들이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10년의 세월동안 많은 분들이 돌아가시고 마을 또한 사라졌다.
 
작가는 사진집을 내면서 가장 염려가 되었던 것이 마을어르신들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점이었다. 사라지는 마을에 사셨던 분들의 아픈 추억들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옛 마을을 찾아주어서 고맙고 잠시나마 잊고 있던 고향 마을을 생생하게 다시 보니 감사하다는 문자를 받으며 이미 모든 것을 다 보상 받았다고 전한다.

“눈이 굉장히 많이 내린 날 박두일에서 차를 운전하고 올라가다가 안두일 쪽으로 못 내려가 혼자 넘어지고 그 바람에 카메라와 렌즈가 모두 깨졌다.”고 무용담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고생 모두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소래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야생화를 처음 피사체로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목포 유달산에서 ‘목포의 눈물’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아가씨를 보고 퍼뜩 든 생각은 내 고향 시흥에 뭐가 있는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지에 대한 반성이었다. 그날은 작가의 인생에 있어 전과 후로 나눌 만큼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2004년 갯골의 소금창고를 찍기 시작하고, 사라져가는 마을을 피사체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난영의 죽음이후 무덤을 카메라에 담았다.
 
“소금창고는 세 번째 '물고기 노닐다' 사진전을 할 즈음에 모두 파괴되었다. 나의 살던 고향도 사라진 것이다.”는 작가는 피사체의 대상이 사라지고 떠나보내는 모습들이 상당부분 많이 차지한다. 이번 사진집을 준비하면서도 둔터골의 회화나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불에 타고 베어지고 나무가 있던 자리가 웅덩이로 변해 있는 모습을 봤을 때의 충격과 마음의 상처가 깊었기에 베어진 그루터기는 차마 책에 담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감싸는 것으로 둔터골의 회화나무를 정하고 오면서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솟았다는 작가는 “앞으로 어떻게 변할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과 그다지 변할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은 끝없이 변할 것이고...기록하는 사람은 담담하게 사진을 담을 것이다.”라고

기록은 찍는 게 남겨지는 게 아니라 남는 게 기록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앞으로도 변화해가는 10년의 모습을 기록하며 10년 뒤 또 다른 마무리 하고 싶다고 전한다.

혼자서 하는 작업이다 보니 힘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다독이며 힘을 얻는다. 혹시나 빠트린 것이 있으면 난감하고 속상해 사람들과의 약속도 제대로 잡을 수 없다는 작가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찍고 그 후는 인터뷰와 채록한 것을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꾸준히 시흥을 기록해 갈 것이다.

사진작가 최영숙은 시흥에서 출생, 소래문학회, 시흥역사문화연구회 회원이며, 시흥시 포동 소금창고를 주제로 3회에 걸쳐 전시회를 진행, 2014년 11월 시흥시청 갤러리에서 「나의살던 고향은」 사진 전시회을 개최했다.

/시민기자 박미영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