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흥시 상여소리, 국립민속박물관 무대 올려

시흥지역 선비들의 장례행렬 재현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5/12 [13:4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5/12 [13:41]
시흥시 상여소리, 국립민속박물관 무대 올려
시흥지역 선비들의 장례행렬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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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간시흥
시흥시 국악인으로 시흥 지역 조상들의 삶을 담은 각종 생활의 소리들을 복원 보존해오고 있는 박일엽 씨가 다양한 소리들 중 하나인 ‘시흥시 상여소리’를 오는 5월 15일(일) 오후 2시 국립박물관 무대에 올려 전통 문화의 무형 문화재적 가치를 평가받게 된다.

시흥시의 국악인 박일엽과 <시흥시회다지소리 보존회>회원 50여명이 펼치게 되는 시흥시 상여소리 및 회다지 소리를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민속한마당> 상설공연의 하나로 일요 열린민속 무대에 올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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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공연은 2010년 10월, 2011년 상반기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민속한마당 주말상설공연공모에서 국악인 박일엽이 신청한 ‘시흥시 상여소리’가 공연공모에 선정되어 시흥시의 전통장례의식을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민속한마당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선비의 장례행렬을 재현하게 되는 이번 공연은 가정의례준칙의 영향으로 근래의 상여운구행렬은 매우간소화 되어 최근에 볼 수 없는 굴건제복 착용 및 만장기 행렬, 노제 등 보기 힘든 풍속을 재현해 옛 선비들의 장례절차 등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조선조에 선비들이 은거하던 시흥시의 전통문화적 특성을 반영하여 상여행렬의 첫머리에 방상시 두 명을 배치하여 잡귀를 물리치고, 상여의 앞뒤로는 운삽을 배치하여 천상으로의 비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장례행렬을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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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대에 올려지는 상여소리는 시흥시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악인 박일엽 선생이 재현하고, 회다지 소리는 방산동의 토박이 소리꾼 김인삼 선생이 재현하는데, 김인삼 선생은 방산동 전래의 초혼과 발인제 및 노제 축문을 전통대로 재현하는 점이 특별하다.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예능이수자이며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0호 완제시조창 예능이수자인 국악인 박일엽은 현재 시흥서도소리보존회 지부장과 시흥시 회다지소리보존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 대째 방산동에 세거하는 토박이 소리꾼 김인삼(79)은 상여소리, 회다지소리, 시흥들노래(모심기,모내기)소리 등을 지닌 시흥시 향토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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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6년부터 시흥시 향토민요를 발굴 채록해온 국악인 박일엽은 시흥시 토박이 소리꾼을 찾아 상여소리 및 회다지소리를 채록한바, 월곶동의 방연근(86) 선생, 방산동의 김인삼(79) 선생, 금이동의 신현돌(78) 선생의 상여소리 및 회다지 소리와 동작을 전승받았다.

박일엽은 시흥시 향토민요의 무대화를 통한 전승노력을 계속해 오고 있는데 시흥시 문예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시흥시 여성회관에서 2009년 시흥시 구전민요 발표회(신현돌, 방연근 출연)와 2010년 시흥시 상여소리 발표회(김인삼, 신현돌 출연)를 가졌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우리민속한마당에서 국내외의 관광객에게 시흥시의 전통 선비들의 장례문화를 공연에 올림으로서 가정의 달 오월에 의미를 더하고 있어 기대된다.
 
 
 
인터뷰
 

 중요무형문화재 예능이수자 ‘박일엽’
 
 

▲  예능이수자 박일엽   © 주간시흥

◈ 시흥의 소리를 채록하고 보존하게 된 동기는.
▶ 국악인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옛 조상들의 생활과 함께 불려지던 지역의 무형문화재 등을 채록, 전수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의무감, 사명감에 시작하게 됐으며 특히 시흥시에는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 등지에서 불리던 다양한 소리가 남아있다. 귀중한 문화재 자료로 가치 있는 것으로 보고 누군가가 보존하지 않으면 결국 없어질 수있 밖에 없기 때문에 국악인인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 국립박물관에서 시흥시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계기는.
▶ 시흥시 상여소리가 어렵게 재현할 수 있도록 했으나 계속된 공연 등을 통해 보존해야 하는데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예산과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보존을 위한 예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의 공연이 힘들었으나 마침 국립박물관 공모사업에 신청하여 선정됨으로써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됐다.
 
◆ 공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 그룹별로 공연을 위한 연습을 계속하고 있으며 제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다. 출연료도 제대로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공연을 위한 준비물들을 하나씩 분담하여 참여하는 모습은 너무나 고맙고 미안한 심정이다. 모두가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어 공연하는데 문제없이 준비가 잘되고 있다. 그러나 상여 등 공연 관련 비품들을 준비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특히 상여는 고증을 거쳐 제대로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는데도 1회용인 이미지 상여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이 안타깝다.

◈ 공연 준비하시는데 가장 어려운 점.
▶ 공연에 필요한 예산 문제이다. 기관과 지역 내 후원인들에 대한 관심 속에 공연에 필요한 예산의 후원이 절실하나 실제로 후원은 매우 미약한 실정이다. 금번 공연에 대한 국립박물관에서 1백여만 원의 공연지원을 받고 있으나 실제 최소 소요 경비는 1천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출연진들의 출연료지급이 어려워 제자들을 중심으로 출연을 무료 봉사하도록 요청하다보니 출연진의 섭외가 쉽지 않으며 출연진의 공연장소 이동, 식대 등을 비롯해 공연 소품 마련도 매우 힘들게 준비하고 있다. 일부 음식 등은 출연진들이 조금씩 준비하여 해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공연이 상여를 메고 하는 공연으로 힘 있는 젊은 사람이 필요한데 젊은 출연진을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학교 특별활동 교육차원에서라도 지정학교를 선정해 동아리 형태의 학생 활동을 통해 공연을 함께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시흥시, 시흥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시흥시 상여소리를 비롯한 지역 향토 소리들을 잘 보존해가면 지역문화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는 지자체가 꾸준한 예산 지원을 통해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전수자들을 양성하고 정기적인 공연 등이 이뤄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사비를 들여 보존하도록 지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이를 보존하는 데는 비용부담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많다.

시흥의 소리로 시흥시의 재산인 만큼 시흥시와 시의회에서 관심을 갖고 대안을 세워주었으면 하고 부탁하고 싶다. 또한 시민들도 지금까지 발굴하여 보존해온 ‘시흥시 상여소리’를 비롯해 ‘회다지소리’ ‘시흥뱃노래’ 등에 대한 애정을 보여 주시기 바라며 공연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옛날 향수를 느끼며 효의 근본을 배워 갈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시흥의 상여소리를 찾아서’ 동행기

 

▲     © 주간시흥
 

시흥시에서 국악 활동을 왕성하게 펼치고 있는 박일엽 선생이 시흥 향토문화를 발굴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특히 시흥시가 지역의 특수성으로 인해 바닷소리, 농촌의 소리 등 다양한 옛 소리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박일엽 선생은 그중 하나인 시흥시 상여소리를 복원해 전수 받고 이를 재현하여 무대에 올리는 성과를 일궈냈다. 향토 전통 문화로 보존가치가 높은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기 까지는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가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며 복원을 마친 결과, 이제는 국립박물관 우리민속한마당 주말상설공연에 시흥시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게 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주간시흥은 이를 주간시흥 지면과 인터넷 신문인 ‘주간시흥’을 통해 특집으로 싣는다.             <편집자주>
 
 
1. 국악인 박일엽, 시흥시에 뿌리를 내리다
국악 인생 40년차의 아내 일을 돕기 시작한지 벌써 십 여 년이 넘었나보다. 그 전까지 국악은 항시 내게 한 마장 쯤 떨어진 이웃집의 일쯤으로 생각하던 터였다. 외진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홀로이 가 듯 하는 아내의 국악 인생길이 안스러워 봇짐 하나 들어주는 마음으로 뒷바라지 한 것이 벌써 십 여 년이 지난 것이다. 어려서 듣던 민요들을 상기해가면서 국악과 친분을 더해 가다보니 어느새 나도 국악인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나의 전공 국문학과 일정한 영역을 공유하기에 빨리 친숙해진 것일 게다. 아내와 나는 시화지구 개발사업의 정착단계인 1996년도에 군자염전을 매립한 시화공단 배후 아파트 단지에 상가와 아파트 한 칸을 분양받아 둥지를 틀었다.
 
어려서부터 시조창과 판소리, 경기민요를 하던 아내가 당시 서도소리에 심취해 있었고, 서해안가에 새로이 조성된 시화지구는 서도소리를 풀어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아내는 열심이었다. 초기에는 주로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몇몇 성인 문하생들에게 개인지도를 하였다. 그러다가 시흥시 여성회관에서 2005년도 제1회 박일엽의 서도소리 발표회를 하였다. 국악 공연을 관람만 하였지 스탭 경험이 없던 내겐 꽤나 곤욕스러웠던 공연이었으나 그를 계기로 국악인 박일엽의 우호적 동반자에 머물던 시인 정원철은 국악 공연의 연출자로 다시 나게 되었다. 음향이나 조명 등에 관한 지식을 하나씩 주워들면서 무대란 무엇인가, 예술인에게 있어서 무대란 어떤 역할을 하는 가 등의 지식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음향과 조명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기도 했다. 이후 수 년 동안 사회를 보기도 하고, 영상실에 앉아 음향이나 조명 조정을 하고, 리허설의 진행을 맡아 보면서 점점 국악에 관한 전문 지식에 접근할 수 있었다.
 
2006년도 서도소리 시흥지부를 개설하면서부터는 빠른 속도로 공연 예술에 빠져 들었다. 내가 기획하고 연출한 공연만도 근 이 십 여 회에 가까우니 공연 한 회에 1000만원의 예산을 상정할 경우 근 이 억 여 원이 넘는 돈을 들여 키운 연출가가 된 것이다. 여전히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스탭이 된 것이다.
 
2. 폭넓은 국악의 세계, 근원 찾기
아내 박일엽은 전북 임실 태생이다. 동편제 판소리의 본향인 남원과 임실이 지척지간이다보니 어려서부터 판소리와 시조창을 접하게 되었다. 임방울 국악단이 동네에 들어와 한 달여 천막치고 머물면 아내는 동네에서 차출한 아역가수가 되곤 했다. 판소리의 명인 오정숙 선생에게 배우기도 하다가 전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는 서울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밴드부에서 북을 치기도 하였으나 정작 대학교 진학은 의상학과로 진학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공 공부보다는 안향년 선생을 찾아가 남도민요를 공부하고, 전설적 경기 명창인 김옥심 선생을 찾아가 경기민요를 공부하는, 기나긴 국악과의 동거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삽 십대 들어서 서도소리를 만나게 되었다.
 
어떻게 지치지도 않고 줄곧 국악의 갈래란 갈래는 다 찾아서 공부할 수 있었냐는 질문을 하면 “아마도 가계에 전해온 피의 흐름이 아닌가 한다.”고 아내는 답을 한다. 아내의 친할아버지 박성환은 임실과 남원의 인물이었다. 할아버지 박성환은 양반 자손이 광대노릇 한다고 하여 남원의 본가에서 쫓겨 오듯이 임실로 이사 가야했던 당시에도 흔치않은 열두발 상모 꾼이면서 상쇠 겸 퉁소 잽이였다고 한다.

국악은 가무악(歌舞樂)이 한데 어우러져야 한다고 한다.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가 어울려야 하는데 각 부문별 예술적 기량은 한평생을 노력해도 끝을 보기 쉽지 않은 예술이다. 노래의 경우도 민요와 정가, 판소리 등으로 구분하는데 민초들이 즐겨 부르던 민요도 지역별로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가 있고, 잡가도 경기잡가와 서도잡가로 세분화되어 근자에 국악하는 이들은 이 중의 한 분야만을 전공하기 마련이다.
 
한편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정가는 시조창과 가곡, 가사, 시창 등으로 발달하였는바 수 천 년 이어온 한반도의 고유한 노래는 일평생을 바쳐도 배우기 어려울 만큼 다양하며 깊이 또한 모를 지경이다. 아내는 어디서 그런 기운을 받았는지, 절대자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40여년의 국악 수련 기간을 거치면서 전통 성악은 모두 섭렵하는 괴이한 저력을 과시하고 있다. 판소리, 각 지역별 민요, 잡가, 시조창을 반백년의 나이가 되도록 까지 공부하더니 지금은 가곡과 가사를 전수받고 있다. 바쁜 일정 중에서도 아내가 조용조용 해 오던 것이 있다. 잘 정돈된 노래를 스승에게 전수받는 것 외에 동네 명창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토속민요를 채집하는 일이다.
 
토속민요는 투박하며 예술성이 떨어지는? 소리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속에서 전통성악의 원형을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살려 내는 일이 국악인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나 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시흥시의 고유소리를 찾아서 복원하는 일에 참으로 긴 세월을 투자하였다.
 
3. 시흥의 상여소리를 찾아서
우리의 전통예술(성악) 중 가장 근간이 되는 소리는 무엇일까? 한국의 삼대 전통성악은 범패와 가곡, 판소리라고 하지만 이들이 한국의 전통예술의 골격을 드러내고 있기는 하나 보다 시원(始原)을 찾으려면 아직도 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토속민요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어느 학자는 상여소리가 한국 소리의 근간이라고 하였다. 상여소리는 인간의 원초적 슬픔인 가족의 죽음에 대한 탄식, 울부짖음 등으로부터 시작된 소리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그러하다. 상여소리를 듣는 누구라도 눈물짓는 모습을 볼 때에 한민족의 가슴 깊은 곳에서 비어져 나오는 소리임이 틀림없다.
 
어로요인 부산 다대포 후리소리를 들으면 뱃노래에도 상여가락이 불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들노래에도 회다지 소리가 들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여소리는 한민족의 보편적 감성이 배인 시원의 소리라고 하겠다. 상여소리는 동네마다 조금씩 달리 불려 지는데 시흥의 상여소리는 궁중에까지 알려진 귀한 소리였다고 한다. 시흥시의 염씨라는 이는 고종황제 운구할 때에 상여소리를 메겼었다하니 시흥시의? 토박이 소리꾼들이 치던 상여소리를 찾는 것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었다.

먼저 시흥의 소리꾼들을 찾아 나섰다. 결국 소리꾼들이 상여소리를 메기고 회다지 소리를 부르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상여소리는 실제 상여가 나갈 때 아니면 잘 들을 수 없으니 일단 찾아가서 그들이 부르는 전통노래는 무엇이든 채록해야한다는 생각에서다. 각 동네 통장을 만나 소리꾼을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하니 대부분 타계하시고 어떤 이는 자녀 출가시키고는 서울로 인천으로 이사가 버려 연락조차 끊겨있다고 했다.
 
정왕동에서 가까운 안산 초지동의 둔배미 놀이라는 배치기와 김매는 소리를 조합한 소리의 발굴도 1980년대에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에도 도시로 이사간 토박이 소리꾼들을 찾아가 채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니 30년이 지난 지금 늦었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 조차도 민망할 지경이다. 바닷가 포구였던 포동의 새우개 마을도 찾아갔고, 월곶동과 목감동 등으로 수년 째 찾아 다녔으나 토박이 소리꾼을 만날 수 없었다. 오가는 행길에서 찾아낼 수도 없다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맥 빠지고 지지부진해지고 있던 중에 어느 날 물꼬가 트였다. 시흥문화원 이사님들의 주선으로 토박이 명창을 만나게 되었다.

시흥문화원 감사로 계신 최재갑 선생과 식사하다가 이야기를 건네 소개받은 85세의 방연근 옹은 소래염전 남쪽에 위치한 월곶리(동) 동네 명창이신데 서도소리의 초한가와 난봉가 등을 즐겨 부르시고 동네 상여 선소리를 메기셨다고 한다. 찾아가서 소리를 청하니 극구 사양하시어 몇 차례 방문 끝에 겨우 아내의 국악 전수소로 모시어 난봉가와 회다지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워낙 고령이시어서 당신 혼자 소리를 내시다가는 한 두 마디하고 끊어지곤 했는데, 아내(이하 박선생이라 칭함)가 후렴을 받고 때로 가락을 상기시켜드리면서 채록할 수 있었다. 방연근 옹의 상여소리는 회다지 소리에서 그 기세가 살아난다. 국문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싶은 방연근옹의 회다지 소리는 한 선비가 태어나서 과거 급제한 이후의 영화로운 일생을 그린 내용이었다. 줄거리와 구성이 꽤 충실한 한편의 가사문학이었다.
 
끊었다 이었다 하면서 겨우겨우 채록하였다. 박선생이 두어 시간 다양한 국악소리를 들려주면서 기억을 더듬는 일은 아슬아슬 줄타기와 같았다. 전통 소리의 발굴에 있어 소리꾼이라 알려졌던 이들은 대부분 제보를 통해서 그나마 발굴이 가능한데, 보존의 필요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원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다. 방연근 옹이 너무 고령이어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애초에 소개조차 않았다면 귀한 그 소리를 채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토속민요의 발굴은 전문 국악인이 토속민요 발굴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이 우선 필요하고. 동네의 원주민들이 작은 자료라도 적극 제보로 호응해 주어야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다.

2009년은 시흥시에 정착한 이래 이런 저런 인연이 깊어지는 해였다. 인연이 깊어지면서 토속민요 발굴도 진전이 따랐다. 목감동에 사는 시흥문화원 김영기 이사를 알게 되었다. 평소 낯가림을 하는 나지만 지역 내 토박이? 소리꾼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되었다. 금이동에 사시는 75세의 신현돌 선생을 만나게 된 건 그 인연 덕이었다. 경기민요 노랫가락과 서도잡가 범벅타령을 즐겨 부르시는 신현돌 선생은 시흥시 금이동에서 태어나서 한평생을 금이동에서 살아오신 토박이 소리꾼이신데 지금껏 동네 상여소리를 메겨온 분이셨다. 긴상여소리부터 시작해서 자진 상여소리, 봉분을 다지는 긴회다지 소리, 자진 회다지 소리, 유회방아소리까지 구성지게 다 풀어 내셨다.
 
신현돌 선생을 만난 아내와 나는 다소 흥분했다. 물왕 저수지가 내려다보이는 동산에서의 두 차례 채록을 마치고 식사 자리에서 신현돌 선생과 박일엽은 상여소리를 공연에 올리자는 약속을 하였다. 전국의 상여소리를 채집해 온 박일엽이 받아주는 후렴에 시원스레 선소리를 매기는 신현돌 선생의 상여소리를 들으면서 그간 채록을 위해서 수소문하던 고달픔은 흔적 없고 시흥의 상여소리를 시흥시민에게 알리는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협심이 발동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4. 시흥의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다
아내 박일엽은 공연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내게 기획 및 연출 협조를 당부하였다. 전례없이 고생스런 공연준비를 하였다. 간혹 국악인들이 무속놀이나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는데 공연을 보면서 전통의 소리를 재현하기 위해서 애쓴다는 생각 정도에 머물었는데, 상여소리 공연을 준비하면서 상여소리 공연이 정말 많은 인원과 노력, 경비를 들여야 이루어지는 공연임을 알게 되었다.

공연준비는 다른 공연과 달리 사전 연습기간이 길다. 상여를 멜 상두꾼을 모으고 실제 상여를 메고 발을 맞춰 보아야 한다. 상두꾼 역을 모으는 일도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상여를 메 보지 않은 사람이 대다수여서 사전에 연습을 해야 했다. 신현돌 선생과 박선생 그리고 나는 공연 삼 개월 전부터 매주 만나서 연습을 하였다. 상두꾼은 금이동 목감동 주민들로 상두꾼을 구성하려 하고 싶었으나 연습 일비와 공연 출연료를 제대로 줄 수 없어 결국 주민들로 이루어진 상두꾼의 모집은 한계를 보였다.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에게 전통문화를 보호하자는 구호는 실질적인 협조를 얻어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하는 수 없이 박선생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시흥시회다지소리보존회」를 결성했다. 여자 문하생들이 대다수다보니 상두꾼을 여자로 세워야 했으나 진도에서 여자들이 상여를 메는 관습이 실존하고 여자들이라도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해야한다는 뜻을 새기며 결성하여 공연 연습을 시작하였다.

겨우 상두꾼을 구성하여 매주 토요일에 모여 연습을 하는데 전원 참석은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서 참으로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불참자들로 인해 연습이 자꾸 맥이 끊긴다. 한편 꽃상여를 사전에 준비해야 했다. 물어물어? 천안까지 상여제작소를 찾아가서 꽃상여를 주문하여 상여가 전 수소에 도착하였으나 낭패를 보았다.? 꽃상여의 크기를 짐작하지 못해서 결국 국악 전수소로 들이지 못했고 공연일까지 상여를 보관해둘 데를 찾느라고 진땀을 뺐다. 공공장소에 두자니 주민들이 싫어하여 맡겨둘 장소를 찾는 일조차도 큰 일 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연습도 연습이지만 무대에 올리려면 연출 기획을 하여야 하는데 그 일을 준비해야하는 내가 상여를 메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어떻게 무대를 꾸미고? 어떤 동선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부랴부랴 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공부를 해야 했다.
 
일반적인 상례 절차를 살펴야했고 선소리를 맡아주신 신현돌 선생과의 수없는 대화를 통해 시흥의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는 기획을 마칠 수 있었다. 상여소리 연습에 이어 회다지 소리할 때의 동작을 재현해내는 일도 많은 시간 연습해야 했다. 결국 두 달여 연습을 하고서야 상여소리의 후렴을 받는 일이나, 회다지 소리할 때의 동작 등을 어느 정도 숙지할 수 있었다. 시흥의 상여소리를 전수하고자하는 신현돌 선생과 박일엽의 고생 끝에 겨우 윤곽이 드러난 것이다. 문하생들에게 상여소리와 회다지소리 전반에 걸친 이해를 시키는 일은 마치 신대륙 탐험의 성과와도 비견될 정도였다. 그런데 매주 토요일 연습을 하는 것은 문하생들에게 부담이 컸다. 연습에 참여하지 못하는 문하생들이 급기야 공연에 출연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국악이 생업이 아니고 취미 생활로 참여하는 이들이다 보니 평시의 공부시간 외에 주말에 추가되는 연습이 가정 불화로 불거진 것이다. 결국 문화원에 협조를 요청하여 직원 두 명이 연습 막바지에 동참하여 공연에 투입되었다. 주최 측인 아내와 나는 참으로 마음이 고달팠다. 출연료도 적게 주고, 연습시엔 차비도 안주면서 그들을 동원하는 것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악덕 기업주 같은 생각이 들어, 우리 둘의 인건비 청구를 할 데 없어도 말없이 연습 때마다 식대를 지불해야 했으니, 전통문화 보존이란 노동의 가치를 화폐로 환산하는 사회적 약속을 벗어나야하니 그 어려움이란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누가 자비를 들이며 긴 세월 상여소리를 무대에 올리겠다고 나설 수 있겠나 싶다.
 
상여소리의 재현은 상여준비부터해서 상복, 만장기, 공포, 요여 등 준비물의 종류 파악부터 고된 일이었고, 연구하면서 준비하는 노력과 비용 부담은 사전에 예상치 못한 선이어서 고통스러웠다. '문예진흥기금'의 지원금을 사용할 때엔 사전에 예산 규모를 정해서 그 이내로 사용하는 것이 상례인데 예상치 못한 지출 등은 그저 개인의 호주머니에서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에 올리는 어려움은 아무 곳에도 이야기 나눌 곳이 없었다. 공연에 올리기로 결정하였지만, 신현돌 선생이하 많은 인원을 동원 연습시켜 놓고는 자금부족으로 못하겠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였다가는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전통예술가로서의 자부심마저 모두 무너질까 싶어 그냥 아내와 나 둘이서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공연일이 되었다. 고맙게도 300석 규모의 시흥시 여성회관이 꽉 찼다. 문화원장님의 인사 말씀에 이어 공연을 시작하였다. 시흥의 소리꾼들에게 즐겨 불려 졌던 언문뒷풀이(서도소리)와 범벅타령(서도소리)을 무대에 올리니 이런 노래가 시흥에서 불려졌구나 하는 감탄의 소리가 나오고 박수소리가 커졌다. 시흥의 토박이 소리꾼 신현돌 선생과 박선생이 함께 부르는 노랫가락과 창부타령을 들으며 전문 국악인과 동네의 아저씨 소리꾼이 무대에서 어울어져 부르는 것이 정겨웠다고 한다.
 
방연근 옹은 85세의 고령에도 꽤 많은 소절의 난봉가를 흥겹게 이어갔다. 드디어 상여소리가 무대에 올랐다. 아들 정의범도 상여소리에 영정을 들고 앞장섰다. 영정, 공포에 이어 혼백을 실은 요여(腰輿)가 지나고 그 뒤로 선소리꾼 신현돌 선생과 박선생이 섰다. 약 삼십 여 분간 상여소리를 하는 내내 관중석에선 흐느껴 우는 소리가 새 나온다. 회다지 소리를 할 때엔 구수하면서 느릿한 동작에 맞춘 회다지 소리에 귀 기울이더니 마지막의 ‘어화너’ 소리를 할 때엔 절정에 달했다. 처음 듣는 우리의 소리에 청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신현돌 선생과 박일엽이 번갈아 들려주는 상여소리, 그리고 신현돌 선생과 방연근 선생이 번갈아 들려준 회다지 소리에 박수와 울음소리가 공연장을 메웠다. 출연자 및 스탭들은 그런 정경을 보면서 행복해한다. 이런저런 고초를 겼었어도 환호하는 관중의 소리에 모든 것이 다 녹아내린다.
 
5. 다시 또 무대에 올리다
제1회 공연을 마친 이듬해 가을, 제2회 시흥의 상여(회다지) 소리 공연을 올렸다. 이번에는 시흥시 방산동에 수 대째 세거해 오신 김인삼 선생을 모셨다. 그동안 시청 향토사료실과 문화원에서 그분의 소리를 채록하며 중요시 여겼으나 좀체로 공연에 응하지 않는 어르신이 있다는 제보를 듣고 찾아 뵌 것이다. 명인은 명인을 알아본다고 할까. 박선생과 국악 이야기를 한참 하고는 박선생과 소리를 주고받으며 맞추시더니 이내 당신이 아시는 상여소리와 회다지 소리를 내놓으셨다. 그 뿐 아니라 이후 만남을 지속하면서 당신이 젊어서 논일하면서 부르던 시흥의 들노래도 모두 들려 주셨다 기억이 안 나는 것들은 시간을 두고 찾아내서는 채록에 응하여 주셨다.
 
박선생은 제1회 발표회 준비로 상여소리와 회다지 소리를 보존회원들과의 여름 캠프에서 가르쳤다. 공연에 즈음해서는 지난 해에 신현돌 선생이 회원들과 매주 연습하였듯이, 김인삼 선생께서도 손수 상여소리 선소리와 후렴을 가르치시고 회다지 동작까지도 손수 가르쳐 주셨다. 2010년의 제2회 공연에서의 상여소리는 김인삼 선생과 박선생이 선소리를 메기고 보존회원들이 후렴을 받았으며 회다지소리는 신현돌 선생께서 북을 메고 소리를 메기셨으며 제1회때 선보였던 회다지 동작을 무대에 올렸다.
 
사람은 역경을 겪으며 큰다고 했나, 상여소리를 무대에 두 번 올리고 나니, 조금은 자신감이 생긴다. 두 번째 공연은 첫 번째 공연보다 자금난이 심했으나, 무대에 올리는 준비는 부담이 덜했다. 정말이지 지역 내 독지가들의 후원 한 푼 받지 못하고 공연을 하려하니 두렵기까지 했으나 묘하게도 남들이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해낸다는 의식도 생기고, 현대인에게 전통상례문화를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켜 소개한다는 예술가로서의 욕심에 눈이 멀어 버렸다. 그 결과 자비가 꽤 많이 들어갔지만 주변에서 칭찬도 많이 듣다보니 보람이 꽤 크다. 어린아이가 잘한다는? 칭찬을 듣고는 자기 힘에 부치는 심부름도 마다 않는 심리가 우리 부부에게도 그대로 작용하였다. ‘까짓것, 인생 별 거 있나, 일일이 수지를 맞추며 어떻게 살 수 있나, 생존에 지장이 없다면 자비를 쓸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게도 되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지난 9월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11년도 상반기 상설공연을 공모하였는데, 기왕 시흥의 상여소리를 건져 냈으면 전국적으로 알려야 할 것이 아니겠냐는 숙의를 한 끝에 응모한 것이 선정된 것이다. 깊은 뜻을 살려 응모하여 선정되었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국악인 박일엽의 성실한 국악 활동을 주시하고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국악인 박일엽에게 시흥의 상여(회다지) 소리 공연을 허락하였지만 감당해낼 것이 걱정이다. 동원 인원은 최소한 50명이나 되어야 한다.
 
상여를 메는 인원은 10명에서 24명까지 필요한데, 기왕이면 24명의 상두꾼이 우렁차게 후렴을 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영정, 공포와 만장기가 12개, 상주 5-6명, 게다가 방상씨 2명에 운삽 2명을 배정해야 하는데, 상여소리에 투입되는 보조 인력만도 46명이나 된다. 더욱이 서울까지 이동하여야 하고 상여준비와 관련 부대비용까지 생각하면 필요 인력과 소요자금이 큰데 이를 어떻게 조달할지 고민이다. 그러나 낙관적으로 생각한다. 지금껏 이렇게 일을 저질러 놓고 동분서주하며 감당해 왔으니 아마도 잘 해결될 것이다. 내년 오월이 지나면 시흥의 상여소리는 국립민속박물관에 그 기록물이 영구 보관되고, 경기도 나아가 전국적으로 전통문화의 보고 시흥시의 이름이 높아질 것이다. 어려움과 희생이야 예견되지만 그만한 보람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6. 시흥의 전통문화(예술) 전승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
인간의 삶 그 자체를 문화라고 한다. 그 중에서 전통문화란 한 지역 내의 동족에게 뿌리 깊은 정서적 안정감을 주며 대외적으로 정체성을 확립해 주는 역할을 한다. 현대의 전통문화 마케팅이란 개념의 대두는 그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일 것이다. 시흥시의 정체성을 밝혀주고 끌어줄 시흥시의 토속민요 전승 보급에 우리는 보다 큰 노력을 경주할 필요가 있겠다.

?미래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어 발전하는 것일 게다. 각자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그러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는 시흥군에 속하였다는 노량진에서 태어나 자란 내게는 지금의 시흥시에서 태어나고 자라 시흥에서 공부하는 아들이 있다. 바야흐로 시흥은 우리 가족의 실질적,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아내 박일엽은 국악의 전승 교육에 주력하면서 자신이 발굴하여 무대에 올린 시흥의 토속민요(상여소리,들노래 등)를 전승 보존하는 일에 자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글을 쓰는 나는 나대로 전통문화와 문학의 연계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시흥시를 고향으로 여길 많은 이들은 시흥의 전통문화를 찾고 복원하는 일에 관심을 증대시켰으면 한다.
 
또한 시흥시내의 각계각층의 합심협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 지난 상여소리 공연도 많은 시민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2009년의 첫 번째 상여소리 공연은 직간접으로 문화원의 관심과 애정을 통해서 실현되었고, 2010년의 두 번째 공연은 「시흥시 회다지 소리 보존회」회원들의 적극적 협조로 이루어졌다. 이제 2011년 5월 국립민속박물관에서의 공연은 시작은 국악인 박일엽의 응모와 국립민속박물관의 선정으로 시작하였으나, 진행은 시흥시의 합심 노력으로 진행하여 시흥시의 전통문화를 국가적으로 인정받는 결과를 낳고 싶다. 교육계의 협조가 절실하다.
 
국악인 박일엽의 손으로 발굴한 시흥의 토속민요들, 들노래(모심기,김매기소리), 바다노래(배치기 외), 상여(회다지)소리를 전승하고 대외적으로 발표에 나설 수 있도록 지역 내 고등학교에 동아리팀 발족이 절실하다. 공연 준비 비용은 자비를 들이더라도 인력만큼은 시흥시를 고향으로 하는 젊은 학생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
 
「시흥시회다지소리 보존회」에서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지도할 자세를 이미 갖추고 있으니 어디선가 적극적 협력자가 나서기를 기대해 본다. 다행히 시흥문화원에서 무형문화재 전승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향후 시흥시의 문화적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는 애향시민이 많이 늘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시흥시민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한민족으로서의 통일된 연대감과 아울러 지역적 특성을 이해하는 문화시민들의 역량으로 우리의 시흥시가 더욱 발전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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