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라스 전투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6/22 [14:54]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6/22 [14:54]
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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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돌이켜 보면 동양과 서양을 비교해볼 때 중세까지는 동양이 서양에 비해 분명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이는 인류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획기적인 발명품이 모두 중국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세계3대 발명품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 화약, 나침반인데 이 모든 것을 발명한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이런 발명품을 통해 중국은 서양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 후 105년 후한 회제 원년에 채륜이라는 사람에 의해 종이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로 종이의 발명은 기록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대부분의 역사적 사실이 이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전까지의 기록이라야 이집트의 왕가에서 사용하던 파피루스와 로마시대에 사용하던 연판장 그리고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사용하던 점토판에 새겨진 상형문자가 있었고 중국에서는 대나무를 깎아 만든 죽간과 비단에 글을 적는 방법뿐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점과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점을 한꺼번에 해결한 종이의 발명이야 말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중국의 한나라 시대부터 열린 서양과의 통로인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이 실크로드를 장악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국력이 비례할 정도였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국이었던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완벽하게 장악하기 위해 실크로드의 교역로 상의 타쉬겐트 부근에 있는 석국을 고선지 장군을 보내 토벌하게 했다.

고선지 장군은 석국을 격파하여 석국의 왕을 사로잡아 그 왕을 장안으로 보냈지만 당나라 조정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석국의 왕을 죽이고 말았다.

격노한 석국의 왕자는 마침 서역에서 세력을 뻗쳐오고 있던 이슬람제국에게 당을 응징해 달라고 요청하여 이슬람제국의 아바스 왕조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과시할 기회로 삼아 당군과의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 전쟁이 세계역사를 바꾸게 되는 탈라스 전투이다.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7만의 정예 병력과 아랍 연합군 20만 명과의 전투가 탈라스의 대평원에서 벌어졌다. 고선지 장군은 11년 동안 다섯 차례의 원정을 통해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 천산산맥 같은 고원지대를 돌파하고 남러시아의 땅을 당의 영토로 확보한 명장이었다.

하지만 당나라 군대는 먼 거리를 원정해야 했으므로 보급에 대단히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후방에서 보급을 담당하기로 한 카를루크족이 아랍 편으로 돌아서는 바람에 이 전투에서 당군은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지역이 이슬람화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중국은 이 지역의 지배권을 끝내 되찾지 못해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병사들 중에 종이를 만들 줄 아는 제지공이 있어 서양에 종이를 전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바스 왕조는 이들 제지공들을 이용해 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서방최초의 제지공장을 세웠고 이 제지기술은 이슬람세력
이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지브로울터 해협을 건너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반도로 전해지게 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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