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법 36계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4/06/23 [00:1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4/06/23 [00:11]
병법 36계 제21계 -금선탈각(金蟬脫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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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허물을 벗듯 위기를 모면한다는 뜻으로 전쟁 시 진영은 그대로 두고 주력을 다른 곳으로 빼내 적을 속인 다거나 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해 매미가 허물을 벗듯 새로운 체계를 만든다는 의미이다.
제정 로마시대 삼두정치의 한 인물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루카회담의 결정에 따라 5년 임기의 속주총독을 맡기 위해 기원전 55년 늦가을에 시리아로 떠났다.

60대에 들어선 크라수스는 초조했다. 로마제일의 부호인 크라수스에게 부족한 것은 군사적 명성이었다.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 이미 명성을 얻었고 카이사르도 꾸준히 명성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시리아 동쪽에는 대국 파르티아가 버티고 있었고 파르티아는 아직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 세력과의 경계선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파르티아 원정에 성공해 속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크라수스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군사적 재능이 없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카이사르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그의 아들을 보내주었고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옛날 부하로 군사의 베테랑인 옥타비아누스를 크라수스와 동행시켰다. 그밖에 전쟁 경험이 풍부한 참모진을 갖추어서 시리아로 보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에 부임하자마자 기원전 54년에 파르티아를 침공했는데 뜻밖에 간단히 성공을 거둔 것도 사태를 더한층 악화시켰다. 이 싱겁게 얻은 승리 때문에 총사령관도 병사들도 파르티아를 얕보게 되었다.

아직 군사훈련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파르티아 원정을 결정했다. 원정을 떠나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출발한 다음 곧장 동쪽으로 나가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길로 이 강을 따라 티그리스 강 서쪽에 있는 셀레우키아까지 간 다음 곧장 사막을 가로지른다.

둘째는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자마자 메소포타미아의 사막을 가로지른 다음 셀레우키아로 간다.
둘째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참모들은 반대를 했다. 하지만 총사령관의 의견이 다른 의견을 제압했다.

크라수스는 시리아 속주를 방어하도록 1개 군단을 남겨 놓고 나머지 7개 군단을 이끌고 모두 출정했다. 2만9천6백 명의 중무장 보병, 투석이나 활을 사용하는 경무장 보병 4천, 기병 4천 그밖에 노예까지 합하여 4만에 가까운 전력이었다.

서방의 패권자 로마의 3대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이들을 맞이하여 싸워야할 파르티아에는 수레나스라고 불리는 청년 귀족이 있었다.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물로 파르티아 왕궁에서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갓 서른 살이 된 이 청년 귀족은 파르티아 쪽의 전략을 담당했다. 오로데스 왕은 군대를 거의 다 이끌고 북쪽에 있는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갔다.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가담하겠다고 약속한 아르메니아를 자기 나라 안에 못 박아 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크라수스는 수레나스가 상대한다는 전략이었다. 수레나스가 이끄는 병력은 기병 1만에 불과 했다.
 
/편집위원장 김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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