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병법 36계 제18계 - 금적금왕(擒賊擒王)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4/04/30 [23:3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4/04/3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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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 36계 제18계 - 금적금왕(擒賊擒王)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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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12월 22일 청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산성의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한 방어에 성공한 조선군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몇 번의 공격에도 성공하지 못한 청군은 전략을 바꿔 산성과 외부와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했다. 그리고는 간헐족인 소규모 공격을 계속 해 조선군을 성에 완전히 고립시켰다. 충청, 전라, 경상에서 올라온 근왕병들이 진출했지만 청군의 요격을 받아 모조리 패퇴시켰다.

12월 30일 7만 명의 청태종이 거느린 본대가 드디어 서울을 거쳐 산성으로 진군했다. 삼전도에 지휘소를 설치한 청군은 1월 11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산성을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하여 산성수비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전술을 택했다. 산성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아 병들고 굶어죽는 자들이 속출했다. 더욱이 극심한 추위는 성내의 사찰과 집을 뜯어 땔감으로 사용할 지경이었다. 1637년(인조 15) 1월 23일 밤 청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어 이튿날 새벽까지 네 차례에 걸쳐 동문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25일 아침 청군은 산성에서 500보까지 근접하여 포위망을 더욱 압축했다. 그러나 산성에 포격만 가할 뿐 더 이상 적극적인 공격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강화를 요구했다.

청군은 남한산성 공격과 더불어 강화도를 공격했다. 1월 22일 새벽 청군 6천명은 선박과 뗏목에 분승하여 감곶 연안을 공격했다. 험준한 요새인 감곶을 버리고 강화성으로 물러나 수성하겠다는 감찰사 김경징의 오판은 청군으로 하여금 커다란 손실 없이 강화도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김경징은 퇴각명령을 내린 뒤 자신은 육지로 도망가 버려 남아 있던 100여 명의 장졸들은 모두 전사했다.

청군이 강화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여 포격으로 성의 곳곳을 무너뜨린 다음 물밀 듯이 성으로 쳐들어가자 강화성이 함락되고 1월 26일 아침에는 왕비, 왕자, 관료 및 그의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 청군의 삼엄한 경비하에 강화도를 출발하여 삼전도의 청태종에게 인계되었다.

같은 날 청군은 남한산성에 사절을 보내 강화도를 함락한 사실을 통보하고 국왕의 항복을 독촉하자 결국 인조는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1월 30일 인조는 항복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섰다. 청태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국왕을 기다렸다. 국왕은 말에서 내려 단 아래로 나가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여진족이 천자를 배알할 때 하는 의식)의 예를 올렸다.

조선 국왕이 예를 마치고 대국에 대항한 죄를 용서해달라고 청하자 청태종은 조선 국왕을 용서한다는 조칙을 내리고 조선 국왕을 자신의 좌측 상석에 앉도록 함으로써 모든 제후 중에 가장 우선한다는 암시를 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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