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병법 36계 제18계 - 금적금왕(擒賊擒王)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4/04/13 [17:4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4/04/1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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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법 36계 제18계 - 금적금왕(擒賊擒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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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부터 잡으라는 뜻으로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의 시 중에 출새곡(出塞曲)이란 시가 있다. 출새, 나갈 출자에 성채 새자, 그러니까 변방의 요새를 나가면서 부르는 노래라는 뜻의 출새곡이다.

그 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을 잡으려면 먼저 말을 쏴라!
도둑을 잡으려면 먼저 그 우두머리를 잡아라!

두보가 이 시구를 읊은 이유는 간단하다다. 어떤 사람을 잡기 전에 그 사람이 타고 있는 말을 쏘아 쓰러트리면 그 사람은 저절로 말에서 떨어지게 되어, 결국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고, 상대방을 무너트리기 전에 먼저 그들의 우두머리를 잡으면 결국 그 우두머리가 이끄는 조직은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두보의 출새곡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금적금왕(擒賊擒王)이라는 고사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다른 지역을 보지도 않고 오직 조선왕이 살고 있는 곳을 향해 진격을 해 조선왕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일은 금적금왕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1616년 누르하치는 모든 여진족을 정벌하여 병탄하고 칸에 오른 다음 팔기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1618년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명나라는 조선에 출병을 요구했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광해군은 파병을 하게 된다.

1619년 명군 8만6천명, 조선군 1만 3천명으로 구성된 사로군은 소자하 강변 사르호산에서 후금군과 일전을 벌였지만 참패했고 조선의 원병은 퇴로가 막히자 투항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의 참화가 끝난 지 20년도 지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국제적 정세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것이 기본 정책이었다. 그래서 후금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광해군은 노력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외교정책은 급변하고 만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 반정세력은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친명정책을 편 것이었다.

명과의 대대적인 전쟁을 앞둔 후금으로서는 친명정책을 펴는 조선을 뒤에 두고서는 명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없었기 때문에 1627년(인조 5) 후금의 태종은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후금군이 의주성을 함락하고 평산까지 진격하자 국왕과 세자는 강화도와 전주로 각각 달아났으며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퇴로를 위협하자 조속한 화의를 추진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고 정묘화약을 체결한 뒤 철군했다.

편집위원장 김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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