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위원장 김용일
폼페이우스 군대는 조금씩 궁지에 몰렸다. 이제 마실 물조차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기다렸다. 절망에 빠진 적은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왔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응하지를 않아 양군은 대치만 하다가 끝이 났다.
이튿날 아침 카이사르는 게르만 기병대를 적의 배후로 보냈다.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데다 배후까지 포위당하는 궁지에 빠지자 마침내 아프라니우스는 항복사절을 카이사르에게 보냈다. 아프라니우스는 “우리는 이제 충분히 고통을 받았다. 물도 없고 식량도 바닥나고 퇴로도 끊기고 이제 더 이상은 육체적인 고통도 정신적인 굴욕도 견딜 수 없는 상태여서 항복을 제의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카이사르는 아프라니우스 휘하의 장병들을 향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의무에 충실했다. 그 점에서 쌍방이 아무 차이도 없다. 전투에 유리한 상황에서도 피를 흘리지 않고 화평할 가능성이 있다고 믿고 기다렸다. 오직 수뇌진 만이 증오와 오만에 눈이 멀어 이 현실을 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었던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나는 이 마당에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겠다. 아프라니우스 휘하 장병은 모두 제대한다.” 카이사르는 루비콘 도하를 결행할 수밖에 없도록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맹비난한 뒤 다음과 같은 말로 연설을 끝냈다.
“내 조건은 하나, 아프라니우스 휘하 군대는 에스파냐 속주에서 나가서 해산하라는 것뿐이다. 이것이 실현된다면 누구의 목숨도 빼앗지 않겠다.” 아프라니우스와 페트레이우스는 둘 다 폼페이우스가 있는 그리스로 떠나는 쪽을 택했다. 이날은 기원전 49년 8월 2일이었다. 카이사르는 레리다에 도착한지 한 달 일주일 만에 에스파냐의 폼페이우스 군대를 해체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카이사르는 9월17일에 에스파냐의 남쪽 카디스에 도착했고 여기서 해로를 따라 9월25일에 타라고나에 입성했다. 2개 군단과 함께 에스파냐 남부를 지키고 있던 바로는 카이사르가 접근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투항했다. 이렇게 해서 7개 군단이나 되었던 에스파냐의 폼페이우스 군대는 모두 해체되었다. 이것은 동쪽, 서쪽, 남쪽의 세 방향에서 카이사르를 포위한다는 폼페이우스의 웅대한 전략이 서부전선에서 틀어진 것을 의미했다.
에스파냐를 제압한 카이사르가 마르세유로 돌아온 것은 10월 중순이었고 10월 25일 마르세유도 마침내 함락되었다. 카이사르는 항복한 마르세유 주민들에게도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독립국으로 존속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마르세유가 주변에 갖고 있던 토지를 몰수해 남 프랑스 속주에 편입시켰다. 이런 전후 처리를 한 다음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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