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는 뜻으로 때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형주 태수 유표는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이 아님을 알고 유비에게 형주를 부탁했지만 유비는 이를 기필코 사양했다.
유표가 죽고 형주는 조조의 차지가 되었지만 적벽대전의 참패로 인해 형주는 무주공산이 되고 말았다.
창업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하는 유비에게나 대륙으로의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손권에게나 형주는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서로 차지하려 했지만 결국 제갈공명의 지혜로 형주는 유비의 차지가 되었다.
억울하게 형주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오나라의 손권은 서기 215년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적 충돌직전까지 갔지만 이미 익주를 점령한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의 세 군을 손권에게 반환하고 강릉, 무릉, 영릉 세 군은 유비의 영지로 삼는 것으로 협약을 맺음으로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되었다.
그러던 중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치기 위해 출정하자 유비는 조조가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급히 손권과 화친을 맺고 익주로 철수해버렸다. 그러나 조조가 내정문제로 수비를 하후연과 장합에게 맡기고 철군하자 유비는 법정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중을 침공할 것을 결정하고 218년 몸소 출병하여 219년 하후연을 대파했다.
그러자 조조가 다시 한중으로 공격해 홨다. 하지만 견고한 수비를 굳히고 있던 유비군을 공격하다 지쳐 계륵이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가고 말았다.
그즈음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관우는 유비의 한중 정벌에 맞추어 강릉에서 북진하여 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조조는 우금으로 하여금 조인을 후원하어 보냈지만 장마로 인에 대패하여 관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틈을 타서 손권은 여몽으로 하여금 형주를 점령하게 하자 근거지를 잃은 관우가 돌아와 형주를 찾으려하다 오나라의 매복에 걸려 사로잡히고 말았다.
오나라의 손권은 관우부자를 참수하여 그 수급을 조조에게 보냈고 관우의 수급을 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가 세상을 떠났다. 관우의 죽음을 들은 유비는 죽은 관우의 복수를 하기 오나라와 전쟁을 하기로 하고 전 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유비의 촉군은 10여차례의 전투에서 승리를 하며 파죽지세로 진격해갔다. 당황한 오나라의 손권은 약관의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유비군을 상대하기 했다.
육손은 촉군이 연전연승으로 인해 적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영해 있는 것을 간파하고 전군에 교전을 피하고 수비를 굳건히 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끌어 피로에 지친 촉군을 한꺼번에 궤멸시키려고 한 이일대로의 전법을 택한 것이다.
서기 226년 여름, 육손의 장기전에 피로가 극심해졌고 더위에 사기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유비는 전군을 숲속으로 이동해 진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숲이 무성한 고지대에 진영을 설치한 것을 안 육손은 화공으로 총공격을 해 유비군을 궤멸시켰다. 간신히 탈출한 유비는 백제성으로 피신하여 이릉대전은 유비의 참패로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유비는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