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2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7/27 [15:3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7/27 [15:35]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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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 용 일              © 주간시흥

 
의화단의 난이 한창일 때 러시아는 청국의 동삼성(만주)에 대(大) 부대의 군대를 들여보냈다. 분명히 의화단의 일부가 동삼성에서 철로를 파괴했기 때문에 철도의 보호를 명목으로 하는 출병이었지만 사실상의 점령이나 다름이 없었다.

동삼성을 자국의 세력권 안에 두고 장차 이곳을 영유하겠다는 것이 러시아의 국책이었다. 하지만 조선을 세력권에 넣고 그것의 영유를 목표로 하고 있는 일본과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홍장 (Li Hungchang, 李鴻章) 중국   청대말의 정치가     © 주간시흥

 
의화단 사변이 일어나자 이일을 해결할 인물은 이홍장 밖에 없어 그는 신축조약을 맺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복직한 직례총독을 그대로 가진 채 1901년 11월7일 죽자 산동순무인 원세개가 직례총독 대리가 되었고 이듬해 6월에 직례총독으로 승진해 명실공히 직례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어 그의 시대가 도래 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신건육군이 북양군도 흡수해 북양상비군이 되어서 원세개의 힘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양상비군 하에 참모, 교령, 병비의 세부처가 설치되고 단기서, 풍국장, 왕사진이 각 처장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원세개의 병권은 지난날 이홍장의 병권을 능가하게 되었다.

다만 이홍장에게는 해군이 있었지만 원세개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대신 원세개는 이홍장이 만들어서 부하인 성선회에게 경영시키고 있던 초상국이라는 기선회사를 자기 직할로 두었고 전보국도 접수해 중앙에서도 원세개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원세개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것은 황족을 비롯한 만주족 중신들이었다.

원세개의 병권을 박탈하여 그의 세력에 제동을 걸려고 하는 움직임이 만주족 중신들 사이에서 싹터 청조정부는 원세개를 군기대신으로 임명했는데 군기대신은 황제의 고문으로써 정치를 결정하는 중추적인 자리이기에 형식적으로는 승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병권을 박탈당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세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북양상비군은 비록 직례총독의 휘하에 있었지만 사실은 원세개 개인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었고 또 후임 직례총독인 양사성은 그의 이종조카였으므로 연줄이 있었다.

원세개가 두려워한 것은 서태후의 죽음이었다. 서태후가 죽으면 광서제가 친정을 하게 되는데 광서제는 강유위와 변법을 시행하려 하다가 원세개의 배반으로 이루지 못했기에 광서제가 친정을 하게 되면 보복 당할 우려가 있었다.


▲광서제의 동생이며 선통제의 부친인 순친왕 (醇親王)     © 주간시흥

 
그러나 행운은 원세개 편이어서 1908년에 서태후가 죽었을 때 거의 동시에 광서제도 죽었다. 39세로 죽은 광서제는 아들이 없어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 재풍의 장남 부의가 즉위했지만 불과 3세여서 아버지인 순친왕이 감국 섭정왕의 지위에 앉았다. 부의의 어머니는 서태후의 조카인 영록의 딸이었다.

철의 여인 서태후가 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청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손문을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하여 중국은 새로운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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