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9)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7/18 [19:3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7/18 [19:38]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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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의 주변사람들은 반변법 반양무의 보수정권을 만들려고 했지만 외국의 간섭을 받아 좌절되자 그들은 의화단의 진격을 배외운동에 이용하려고 했다.

1900년 6월 의화단이 북경으로 들어오자 산동성에서는 반도였지만 북경에서는 `부청멸양`의 근황군으로 환영받았다. 그러자 의화단은 청국 정부에 온갖 요구를 했다. 은과 식량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의화단을 탄압한 관리와 군인의 처벌까지 요구했다.

청국정부는 총리아문의 수석대신을 경친왕에서 단군왕으로 바꾸었는데 경친왕은 외국에서도 평판이 좋았던 인물이었지만 서태후와 그 주변이 배외정책을 수행하려 했으므로 그의 존재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북경에 들어온 의화단은 20만 명이라고 했는데 청국 정부는 배외적 색채가 짙은 동복상의 군대도 북경에 들여놓았다.

그러자 북경에 거류하는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은 위험에 빠졌다. 영국공사 맥도널드는 대고에 있던 함대의 사령관에게 급전으로 구원을 요청했지만 2천명의 해병대는 격렬한 저항을 받아 전진을 못하고 되돌아가고 말았다.

동복상 휘하의 감군은 6월11일 일본공사관의 삼산 서기관을 살해하고 6월20일에는 독일공사 케틀러가 살해되었다. 서양인 1명을 죽인 자에게는 은50냥 여자인 경우에는 은40냥 어린이에게는 은30냥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독일공사를 살해한 다음날 청국 정부는 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각성에 격문을 보내 일치단결하여 배외하고 각성의 의화단을 소집하여 싸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각지의 장관들은 이를 대부분 무시했고 양무파인 호광총독 장지동이나 양광총독 유곤일도 그것에 따를 리 없어서 이홍장과 그들은 서로 연락해 이번 격문은 진짜가 아닌 것으로 하고 따르지 않기로 서로 약속하고 외국인이 가장 많은 상해를 관할 내에 두고 있는 유곤일은 장지동과 상의해 각국의 상해주재 영사와의 사이에 `동남보호조약`을 맺었다.

싸우라는 지시가 내려지자 청군은 외국인을 공격했다. 그 당시 각국의 공사관은 동교민항에 모여 있었는데 의화단은 20만 명이라 수는 많았지만 우두머리가 많아서 명령이 제각각이라 단군왕의 진언으로 장친왕 재훈이 보통군령으로 총사령관이 되고 강의가 의화단 전체를 통솔했지만 2개월이나 걸려도 끝내 동교민항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8개국(일본,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이 대고 포대를 함락시키고 천진에 육박하자 8개국 연합군을 맞아 싸운 것은 직례제독인 섭사성, 총병인 마옥곤 등 청일전쟁의 경험이 있는 회군계통의 장군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가지고도 8개국 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어서 섭사성은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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