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8)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7/09 [12:0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7/09 [12:08]
중국여인열전 - 서태후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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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 용 일              © 주간시흥

 
무술변법의 전해인 1897년 산동에서 독일인 신부 2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 독일의 출병을 초래해 그 결과 독일은 교주만 지역을 보호지화 하고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했는데 이것은 곧 침략이었다.

산동에는 원래 의협의 기풍이 강해서 반체제 호걸들의 이야기인 <수호지>도 산동을 무대로 삼고 있고 청대(淸代)에 세상을 고쳐보겠다는 운동인 백련교가 성했던 고장이기도 했다.

백련교가 탄압을 받은 뒤에도 그 잔당이 여러 가지 형태로 비밀결사를 만들어서 비밀결사는 난립해 있었는데 이것은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는 작은 규모로 난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일 것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매체는 권법으로 의화권의 이름을 딴 의화단이라는 결사의 이름이 알려졌지만 원래부터 이런 큰 조직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 청나라 말기에 외세를 배척하기 위해 일어난 비밀결사. 의화단(義和團)
     © 주간시흥

 
독일이 교주만 지역을 세력권으로 삼아 청도에 군항을 만들고 배후지에 철도를 부설하는 단계가 되자 묘지가 파괴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인들은 풍수를 믿고 있었으므로 독일의 개발이 풍수를 바꾸어 버린다고 하여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무술변법 전후에는 홍수와 한발 등 천재가 계속되어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사회불안이 더욱 가중되자 이런 일들은 모두 기독교와 서양인 탓이 아닐까 생각했고 유민이 증가했기 때문에 각지에 난립해있던 여러 결사의 회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이듬해인 1899년 육현이라는 사람이 산동순무에 임명되었을 때 10월에 의화권 사람들이 평원현의 중국인 기독교 신자만이 사는 마을을 습격하여 정부군이 진압하자 육현은 정부군 대장과 진압에 협력한 지사(知事)를 경질했다.

육현은 근대화 및 그것과 관련 있는 사물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갖고 있어서 그의 의견은 의화단을 진압할 것이 아니라 단련(일종의 의용군)에 편입 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화단`이라는 이름은 이 무렵부터 사용되었고 그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육현이 의화단에 배외운동을 허용하고 있는 것을 여러 외국이 묵과하지 않고 간섭을 해 육현은 산서로 전임이 되고 후임 산동순무로 부임해온 사람은 원세개로 원세개는 배외운동보다 자기의 세력을 부식(扶植) 하는데 열심이어서 그는 의화단을 철저히 탄압했다.

원세개 때문에 본고장인 산동에서 쫓겨난 의화단은 직례로 들어가 내수에서 정부군을 격파하고 철도, 철교, 전신선 등 조금이라도 양(洋)과 관계가 있는 것은 모두 때려 부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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