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위는 광동성 남해현 즉 광주출신으로 그 지방의 석학으로 유명했던 주차기의 문하생이 되었다. 주차기는 구강(九江)선생으로 더 알려져 있었는데 그가 내세운 것은 <춘추공양전>의 삼세설(三世說)로 이 세상은 쇠란(衰亂) 의 세상에서 승평(昇平)의 세상이 되고 그 다음에 태평한 세상이 된다는 설이다. 강유위가 입문했을 때는 구강선생은 70세를 넘어서인지 홍수전을 분발케 한 구강선생도 강유위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 중국의 정치가/사상가 강유위 (康有爲) - 캉유웨이 © 주간시흥 | | 강유위를 감동시킨 것은 21세 때의 홍콩 여행에서였다. 서양은 과학기술, 대포, 군함뿐이고 정서면에서는 미개하다는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강유위는 홍콩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서양에 관한 것을 열심히 배우게 되었다. 그 당시 지식인의 상식은 중체서용(中體西用)론으로 중국의 본질을 잃지 않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이용만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었는데 이것은 본질적으로 중국이 서양보다 우수하다는 가치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서양의 정치제도는 분명히 중국보다 합리적으로 발달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이것을 채택하는 것을 강유위는 변법(變法)이라는 용어로 나타냈다. 광서14년(1888) 30세 때 정치의 개혁에 관한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되고 말았다. 강유위가 제자인 양계초와 회시를 보기 위해 도착할 즈음에 굴욕적인 하관조약 체결이라는 사건이 일어나서 요동, 대만의 할양과 2억 냥의 배상금 문제로 북경은 들끓고 있었다. 회시에 몰려든 준재들은 강화조약이 굴욕적이라는 데에 분개하고 강유위도 분개하여 회시에 모인 거자(향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강화조약의 거부, 천도항쟁, 변법의 시행을 내용으로 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상소수리를 거부당했다. 관직이 없는 사람이 정치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상소수리는 거부되었지만 이 상소는 사회의 화제가 되어 세상에 경종을 울리는 구실을 했다. 강유위는 마침내 진사로 합격해 공부주사라는 직책이 주어졌지만 실제로는 취임하지 않았다. 강유위는 설득력 있는 상소를 작성하기 위하여 더욱 사색과 연구에 몰두해 광서23년(1897) 다섯 번째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중신들 간에도 읽혀서 찬반양론이 일어났는데 옹동화 등은 강유위의 주장에 깊이 공감해 옹동화는 그 뒤 광서제에게 강유위를 은근히 천거하는 중개 역을 했다. 광서24년(1898)은 무술년(戊戌年)이었다. 이해 정월에 강유위는 <일본변정고>라는 저서를 상소와 함께 바치고 이어서 자신의 저작인 <아피득 변정기>(러시아의 표토르 대제의 정치개혁기)도 바쳤다. 광서제는 성년에 달했는데도 서태후가 실제 정무를 처리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명목상으로 서태후는 정치를 황제에게 내주고 이화원에 은퇴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그녀는 거기서 권세를 부리고 있어서 강유위의 상소는 광서제의 자립의욕을 북돋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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