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2/02/14 [17:21]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2/14 [17:21]
중국여인열전 - 양귀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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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평원태수 안진경은 남하하려는 안록산의 반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안록산군이 곡창지대인 강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시키고 또 삭방 절도사 곽자의와 그의 부장 이광필 등도 하북에 출병하여 낙양과 범양간 안록산군의 교통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안록산군은 동관을 공격 할 수도 없고 또한 강남으로 진격 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그 무렵 양국충은 운남의 남조를 토벌하기 위해 8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총사령관의 자격으로 원정에 나섰다. 이번 원정은 무공이 없는 양국충이 무공의 관록을 세워보겠다는 야심에서 계획된 일이었다.
남조의 수장 각라봉은 양국충의 원정 소식을 듣고 사죄했으나 양국충은 이를 허락지 않고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자 6만을 내는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장안의 조정에 패전상황을 숨기고 터무니없는 전공만 나열하여 보고했다.

그 후 양국충은 장안에 돌아와서도 마음이 불안하여 동관을 지키고 있는 가서한에게 낙양탈환명령을 내리도록 현종에게 상주했다. 그러자 현종은 적군과 아군의 관계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낙양 탈환명령을 내렸다.

가서한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장안에 와있던 장군으로 그 밑에는 훈련도 받지 않은 오합지졸뿐이어서 동관을 지키기에도 역부족인 형편임에도 황제의 명령을 거역 할 수 없어 낙양을 공격했지만 공격하자마자 전멸상태에 빠지고 가서한 또한 모반을 일으킨 부하로부터 협박을 받아 반란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장안을 지키는 동쪽의 요충지 동관이 안록산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가서한이 동관을 지키고 있을 때에는 매일 밤 봉화를 올려 동관의 무사함을 주위에 알리고 있었으나 어느 날 밤부터 갑자기 봉화가 오르지 않았다. 바로 이 날이 안록산의 수중에 동관이 들어간 날이었다. 봉화가 오르지 않자 장안의 거리는 불안에 떨어 일대 혼란에 빠졌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72세의 현종은 근정전에 모습을 나타내 수도 장안에 잔류할 관리를 임명하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진 하겠다고 했다. 그날 밤 현종은 친위군에게 출진을 명하긴 했지만 안록산의 반란군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날이 새자 현종은 궁문을 열고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과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을 무장한 천여 명의 친위군이 호위하여 서남쪽 촉 땅으로 향했다. 다음날 장안에서 1백 여리 떨어진 마외역에 도착하자 수행하던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 지금까지 꾹 참아오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 때문이다.’라고 분개하며 양국충의 목을 베고 현종의 거처를 포위했다. 그리고 소리 높여 “양귀비를 주살하라.”고 외쳐댔다.

이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들리자 현종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매 죽을 것을 명했다. 양귀비가 죽자 장병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길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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