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1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11/28 [12:4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1/28 [12:44]
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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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 용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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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기의 말을 들은 여록이 이 말을 옳게 여겨 태위인 주발에게 군사지휘권을 넘겼다. 군사지휘권을 넘겨받은 주발은 곧바로 군문에 들어서자마자 북군의 수만 병사 앞에서 주발은 큰 소리로 외쳤다.
“여씨에게 편들자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에게 편들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고 외쳤다. 그러자 군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벗어 유씨를 지지하는 결의를 보였다.
군사들이 여씨를 두려워했던 것은 여씨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북군의 지휘권이 유씨 지지 세력의 중심인물인 주발에게 돌아왔으니 이미 승패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여산이 장악하고 있는 남군에는 여씨 일파가 가장 두려워하는 유장이 쳐들어갔다. 난데없이 유장이 쳐들어오자 당황한 여산은 도망치기 바빳고 남군은 싸우지도 않고 모두 달아났다. 유장은 달아나는 여산을 추격하여 베어죽이고 다시 궁정으로 들어가 장락궁의 경호책임자인 여경시를 베어죽이고 북군으로 달려가 태위에게 이런 사실을 보고했다.
군권을 장악한 유씨들에 의해 여씨 일족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참살 당했고 북군의 지휘권을 넘겨준 여록도 조나라로 돌아가기도 전에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연왕 여통은 사람을 보내 주살했고 여태후의 여동생이며 번쾌의 아내였던 여수는 몰매를 맞아 죽었으며 여수가 낳은 번쾌의 아들 번항까지도 살해되었다.
여씨들이 제대로 반항한번해보지 못하고 정변이 마무리 된 것은 여씨 일족에게는 여태후를 능가할만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에게 두려운 것은 여태후였지 여씨 일족들이 아니었다.
유씨 일족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았기에 여태후가 죽을 때까지 숨죽여 지내오다가 마침내 그녀가 죽자 여씨 일족들을 몰아 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여씨를 몰아내고 다시 유씨의 한나라가 되자 조정의 중신들과 제후들은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하는지를 논의했다. 현재 황제의 자리에 있는 소제 홍은 비록 혜제의 정비 소생이라 황제가 되기는 했지만 사실은 여태후가 여씨 일파의 세력을 심기 위해 여씨와 인연이 깊은 후궁이 낳은 아들이었으며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해 이를 폐하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는 것은 당연했다.
새로운 황제의 후보로는 고조 유방이 낳은 여덟 명의 아들 중 남아 있는 대왕 유항과 회남왕 유장 두 사람뿐이었다. 서열과 성격으로 볼 때 이 두 사람 가운데 대왕 유항을 옹립하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여씨 일파를 토벌하는데 맨 먼저 군사를 일으켰던 제왕 유양도 고조의 적장손으로 유력한 후보임에 틀림없었다.
결국 최종 선발에 남은 사람은 대왕 유항과 제왕 유양 두 사람으로 여씨의 집권에 골머리를 앓았던 중신과 제후들은 이들 두 후보의 외척 문제를 최종적으로 평가하여 결정짓기로 했다.
대왕 유항의 어머니는 박씨로 관후한 장자의 집안이라는 평판이 높았고 제와 유양의 어머니 쪽에는 외척의 세력을 업은 사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성질이 포악하고 거칠어 제왕이 황제가 될 경우 제2의 여씨 정권이 나올 염려가 있다하여 마침내 대왕 유항이 옹립되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명군으로 칭송이 자자한 한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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