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9)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11/07 [20:1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1/07 [20:16]
중국여인열전 - 여태후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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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여태후는 이렇게 여씨 일족의 천하를 다져나갔다.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무력이 제일이라고 생각하고 조왕인 여록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의 지휘권을 맡겼고, 양왕인 여산에게는 남군의 지휘권을 맡겼다. 이들은 각각 제후로서 자신들의 나라가 있음에도 부임하지 않고 수도 장안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있어 한제국의 군대는 완전히 여씨가 장악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여태후가 집권한지 혜제 재위 8년을 포함하여 거의 15년이 흐른 3월 어느 날 겨드랑이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하여 7월에 이르러 더욱 악화되었다. 여태후 자신도 임종이 가까워 온 것을 알고 여씨 일족의 중심인물인 여록과 여산을 불러 당부했다.

“고조께서 천하를 평정한 후 대신들과 맹약하기를 유씨가 아닌 왕은 천하가 모두 함께 쳐 없애라 하셨다. 지금 여씨 일족을 왕으로 세운데 대해 대신들이 모두 불만을 품고 있으니 내가 죽은 뒤에 변이 일어날까 두렵다. 그러니 부디 내 장례는 소홀히 하더라도 군대를 잘 거느려 궁궐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라. 유씨 일파가 궁정을 제압하면 큰일이니 재삼 경계하도록 하라.”고 한 뒤 8월 7일 사망했다.

여태후의 유조에 따라 천하에 대사령을 내리고 여산을 상국으로 여록의 딸을 황후로 삼았다. 그리고 여태후가 병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연왕 유건이 죽자 유건에게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구실을 붙여 여씨 일족인 여통을 새로운 연왕으로 세운 일이었다. 사실 연왕 유건에게는 애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지만 여태후는 이 아들을 무참히 암살해버렸다.

이렇듯 여태후는 여씨들의 천하를 만들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썼으나 천하의 일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가 죽자 제왕 유양은 여씨들을 타도할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유양은 노원공주에게 성양군을 바치고 겨우 목숨을 건진 제왕 유비의 아들로 유양이 군사를 일으키기로 한 것은 주허후 유장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유장은 제왕 유비의 동생으로 장인이 여씨 일족의 중심인물인 여록으로 여태후가 죽자 여씨가 수도 장안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유씨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그들의 천하를 만들기 위한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도 장안은 여씨가 군권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쳐들어온다면 그 소문을 듣고 장안에 있는 유씨파의 공신들과 대신들도 분발해서 여씨 타도에 가담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유장은 그의 형 유양에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제왕 유양이 군사를 일으키려하자 여씨 일파의 인물로 감시 임무를 띠고 제나라에 재상으로 파견되어 있던 소평이 한발 앞서 제나라 궁전을 포위해버렸다. 그러자 제왕 유양의 가신 위발이 왕궁의 경호를 도와주겠다고 소평을 속여 소평의 저택을 포위하자 그는 입술을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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