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여인열전 - 문강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1/06/27 [18:05]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6/27 [18:05]
중국여인열전 - 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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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위원장 김용일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편찬했다는 <춘추>에서 유래되었으며 시대적으로는 주나라가 도읍을 낙양으로 옮긴 B.C 770년부터 진(晉) 나라의 대부 위사, 조적, 한건이 그들의 라이벌인 지백을 없애고 그 땅을 3분한 후 제후로 봉함을 받은 B.C 403년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주나라 초기에 1천여 국이나 되던 제후국들이 120개국으로 줄었다가 제(濟), 노(魯), 정(鄭), 송(宋), 조(曹), 진(晉), 초(楚), 진(秦), 채(蔡), 연(燕), 위(衛), 진(陳) 등 10여 개 국으로 줄어든 시기였다.

이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나라가 제 나라로 제는 주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인 태공망 여상이 제후로 봉해진 나라로 지금의 산동 반도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태공망으로부터 13대 후손인 희공에게는 제아, 규, 소백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고 큰아들 제아가 태자로 봉해졌다. 그런데 큰아들 제아가 그의 누이동생인 문강과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막내 동생인 소백과 그의 스승인 포숙뿐이었다. 이런 패륜행위가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한 제나라 중신들은 문강을 노나라에 시집보냈다. 그때 마침 규의 스승이 은퇴하자 포숙아가 추천한 사람이 관중으로 이 두 사람이 지금까지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관포지교’의 주인공이다.

B.C 697년 희공이 죽고 태자 제아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양공이 되었다. 얼마 후 노나라로 시집갔던 문강이 남편과 함께 근친을 오자 양공과 문강은 자제력을 잃고 정열을 불태웠다. 

문강의 남편이 이 일을 눈치 채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문강을 죽여 버리려고 하자 문강은 오빠에게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양공은 완력이 뛰어난 팽생을 시켜 문강의 남편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양공의 명을 받은 팽생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문강의 남편을 부축하는 척하며 손가락으로 늑골을 부러뜨려 죽이자 노나라에서는 주군의 사인이 늑골의 골절에 있음을 확인하고 팽생의 처벌을 요구하자 양공은 할 수 없이 팽생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양공은 누이동생 문강을 제나라에 머물게 하고 불륜의 관계를 계속하여 사생활이 문란해지자 정치도 말이 아니어서 기분 내키는 대로 정사를 처리하니 법령이 설리가 없고 간사한 무리들이 판을 치게 되었다.

양공의 동생인 규와 소백도 자신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가 없어 소백은 포숙아와 함께 거로 망명했고 규는 광중과 함께 노나라로 망명했다.  이때 양공은 노나라와의 국경수비를 위해 수비대장에 연청과 관저보 두 사람을 보내고 1년이 지나면 교체를 해주기로 약속했지만 1년이 지나도 약속이 지켜지질 않자 이에 불만은 품은 두 사람은 양공의 사촌동생인 무지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양공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지하고 있던 반란음모자들은 양공의 정치가 점점 어지러워지자 무지를 앞세워 궁중에 침입한 다음 다락방에 숨어있던 양공을 죽이고 반란에 성공했다. 더불어 양공과 불륜관계였던 누이동생 문강도 처형함으로써 정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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