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쿠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며 전쟁이 터지자 당시 쿠바는 종주국 스페인보다 미국과 더 많은 교역을 했기에 미국은 미국인과 미국시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1898년 초 메인호를 쿠바에 파견했다.
그런데 2월 15일 메인호에서 큰 폭발이 일어나 수십 명의 수병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하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단정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1976년 조사에서 이 폭발은 스페인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보일러실이 폭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6개월 간 스페인과의 전쟁은 미국인들이 역사에 ‘소풍과도 같은 전쟁’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수월한 전쟁으로 전쟁은 간단히 끝났지만 전리품은 엄청났다. 미국이 쿠바를 장악함으로써 사실상 쿠바를 챙긴 것이나 다름없었고 또한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하면서 괌과 사모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승리의 대가로 미국이 얻은 최고의 전리품은 필리핀으로 1898년 12월 파리조약에서 미국은 2,000만 달러에 필리핀을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았다. 그러나 아시아에 자리 잡은 필리핀에 미국이 진출하는 것을 신흥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이 그냥 둘리 없어 1905년 일본의 가쓰라 수상과 미국의 태프트 국무장관이 밀약을 맺고 이 밀약으로 필리핀을 미국이 차지하는 대신 한반도가 일본으로 넘어 갔다.
미국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파나마 운하로 파나마 운하가 없다면 쿠바 해역의 전함이 태평양으로 가기 위해 남아메리카를 돌아야 했고 돌아가는 거리가 4만km에 달해 엄청난 시간과 물자가 낭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미국의 군사력이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1901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파나마 지역을 소유한 콜롬비아와 협상을 했으나 콜롬비아측의 요구가 너무 커 별 진전이 없었는데 때마침 파나마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미국은 즉각 개입해 콜롬비아군의 개입을 막고 파나마를 독립국으로 인정해주는 대가로 운하개발권을 얻어내 1914년 파나마 운하가 개통됨으로써 태평양과 대서양이 이어지게 되었다.
1911년 멕시코에서 쿠테타가 일어나 국내정치가 어수선해지고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미국 제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정의와 인권을 내세워 멕시코 독재정권의 승인을 거부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선원을 체포하는 등 반미성격을 분명히 하자 멕시코 국경을 넘어 군대를 파견했다.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분명한 영토침범이자 주권침해였지만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하며 도와줄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미국의 멕시코 내정간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이 맹주임을 과시한 행위였고 중남미에서 미국에 적대적인 정권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정책을 분명히 밝힌 사건이었다.
그러나 인권을 앞세우고 멕시코에 쳐 들어간 행위는 미국의 분명한 제국주의, 패권주의를 나타낸 것으로 이 행위는 중남미에 반미감정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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