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6)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8/01 [15:42]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8/01 [15:42]
남북전쟁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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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1860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부에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남북 균형은 공업의 발달과 함께 북쪽으로 기울어져 가는데다 연방의회도 북부가 다수를 차지하고 법도 북부에 유리하게 만들어졌다. 또한 철도도 북쪽에만 건설되었고 노예들은 계속 북부로 도망치는가 하면 해외에서 몰려드는 이민은 북부로 집중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판에 북부는 노예제 폐지를 외치며 남부를 몰락의 길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남부의 마지막 희망은 남부에 동정적인 대통령을 뽑는 것이어서 1860년 선거는 남부의 사활을 건 선거였지만 그들이 가장 증오하는 반노예주의자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절망에 빠진 남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연방을 탈퇴하는 것뿐이었다.

링컨의 대통령 취임 직전인 1861년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자 그 뒤를 6개의 남부 주들이 따라 나와 이들 7개주는 스스로 독립국가임을 선언한 뒤 독자헌법을 제정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에 선출함으로써 미국연방은 건국 84년 만에 공식적으로 미국연방과 남부동맹으로 분열되었다.

1861년 링컨이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공식 취임했다. 그의 취임은 곧 있을 4년간에 걸친 남북전쟁의 서막이었다. 남북전쟁의 첫 포성은 섬터요새에서 울렸다.

남부는 연방을 탈퇴한 뒤 남부 연맹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연방정부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고 강제로 연방정부군 기지를 차례로 점거하던 중 남부에 있던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찰스턴 항구안의 섬터요새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정부군이 철수를 완강히 거부하자 1861년 4월 12일 새벽 남부동맹군이 이곳에 포격을 가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뒤 불런 강가에서 남부군과 북부군이 첫 전투를 시작하여 북부군이 패배했다. 남부군은 지금도 존경받는 최고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공격을 강화하여 남북전쟁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했다.

1862년 8월에 접어들면서 남부가 대대적인 총공세를 펼치자 북부는 큰 위기에 봉착했다. 미국의 전쟁을 관심 있게 지켜보던 유럽 국가들의 태도가 점점 바뀌었다. 프랑스는 멕시코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부와 가까워질 필요가 있어 남부동맹을 국가로 인정하고 지원을 해주어 이익을 챙기려 했고 영국도 남부의 면화가 없으면 자국의 방적산업이 치명타를 입기 때문에 남부동맹을 인정하고 지원하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1862년 9월 17일 중요한 앤티텀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했다는 승전보가 날아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링컨은 전쟁에 지면서 노예해방을 선언하는 우스운 꼴이 될 뻔 했다며 지금이야말로 노예해방을 선언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 1862년 9월 22일 각료회의에서 역사적인 노예해방선언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865년 1월 수정헌법 13조에 의해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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