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7/05 [14:1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7/05 [14:17]
남북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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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위원장  ©
남부가 농업에 주력하는 사이 북부는 북부대로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어 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있어서 농기계를 개발하여 농업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만들어 남부에서는 면화농업이 북부에서는 섬유산업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산업혁명은 북부사회를 크게 변화시켜 1810년까지만 해도 230만 명의 노동력 가운데 200만 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1만 명만 섬유산업에 종사했지만 1812년 영국과의 전쟁 이후 섬유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20배 이상이나 늘어나 미국의 섬유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농업과 공업이 발달했다는 것은 그만큼 물자 운송량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여 로버트 풀턴이 개발한 증기선으로 물자 운송능력이 몇 배씩 늘어났고 대량운송 수단으로 철도가 이용되기 시작하여 드넓은 미국이 하나로 묶여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과 북은 지역 이해가 맞부딪치면서 급속히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있었다.

미국사회가 농업중심의 남부와 공업중심의 북부로 갈라지면서 미국의 정치도 남북으로 완전히 갈라져버렸고 남북 간의 큰 쟁점으로 노예제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 정치가 나름대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노예주가 11개주,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가 11개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1819년 새로 미국의 영토가 된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가입을 신청하면서 노예주와 자유주간의 균형이 깨지면서 미국 정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 소란은 때마침 매사추세츠주의 일부가 떨어져나가 메인주가 되면서 메인주를 자유주로 하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시 균형을 맞췄다.
하지만 영토가 계속 늘어 새로 가입하는 주가 늘어 날 때마다 이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해 앞으로 늘어 날 새 주의 경우 북위36˚ 30´을 경계로 하여 그 이남에서는 노예제도를 인정하되 그 이북에서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노예제도 채택의 원칙인 미주리협정이 1820년 조인되었다.

미주리협정으로 노예주와 자유주간의 균형은 잡혔지만 그것은 단지 임시방편으로 언제 불타오를지 모르는 불씨였다. 이런 와중에도 남부에서의 비인간적인 노예제도가 날로 확산되어 흑인노예의 삶이란 개나 돼지만도 못한 비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어서 견디다 못한 내트 터너라는 흑인이 1831년 70여 명의 흑인동료와 버지니아주 사우스햄프턴에서 폭동을 일으켜 백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여 백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는 다른 흑인들도 봉기에 참여하길 바랐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흑인들이 폭동에 참여하지 않아 결국 백인토벌대에 붙잡혀 공개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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