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6/28 [14:24]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6/28 [14:24]
남북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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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미국은 1820년대부터 서부진출을 본격화 하면서 1830년대와 1840년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대대적으로 확장해갔는데 특히 1836년부터 1847년까지를 미국의 팽창시대라 한다.
 
또한 미국은 서부진출과 동시에 산업혁명기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공업이 발달하고 원료와 상품 수송을 위한 도로와 운하건설이 가속화되었으며 늘어나는 일자리를 메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이민자가 몰려들었다.

이렇게 산업과 사회가 급격히 변화하자 결국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적인 남부세력과 공업과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부유층인 북부세력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원했던 남부와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시대적 대세를 이끌던 북부는 결국 미국의 주도권을 놓고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남북전쟁이었다.

남부의 농업혁명은 한 젊은이의 발명으로 크게 번져 나갔다. 18세기 말 미국은 주로 담배를 수출했는데 땅을 쉬게 하지 않고 계속 담배를 심어 양분이 메말라 척박해지자 새 땅을 찾아 서부로 진출하면서 인디언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때 새롭게 인기를 끈 것이 면화 농사로 면화는 방적산업이 발달한 영국 등에 얼마든지 팔수 있는 노다지 상품이었다. 그러나 면화는 씨를 빼는 작업이 너무나 복잡해서 솜씨 좋은 일꾼이 하루 종일 일해야 겨우 500g의 씨밖에 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예일대학을 갓 졸업하고 조지아주의 어느 농장주 집에 가정교사로 일했던 앨리 휘트니란 젊은이가 간단하게 씨 빼는 기계를 고안해 냈다. 이 기계는 사람 손보다 무려 50배나 빠른 속도로 씨를 빼낼 수 있어서 이를 계기로 미국의 남부 면화농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800년대 면화농사는 미국 남부에서 최고 수지맞는 장사로 1821년에 이르러서는 면화의 수출이 담배 수출액의 4배로 증가했으며,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면화 수출액은 그 어떤 상품의 수출액보다 많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면화농사를 하는 남부에는 두 가지가 절실하게 필요했는데 하나는 면화를 심을 수 있는 새롭고 넓은 농경지로 이는 계속되는 새 영토개척에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대형 면화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엄청난 노동력으로 이는 값싼 노동력인 노예 수요가 폭등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노예제를 주장하는 남부와 폐지를 주장하는 북부의 전쟁이었지만 면화농사가 시작되기 전에는 오히려 남부가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면화 농사가 시작되면서 노예야말로 남부의 경제를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되어 노예제 폐지란 말은 그대로 남부경제를 완전히 파탄시키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노예의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1790년 노예 한명의 몸값이 300달러였던 것이 1850년에는 2,000달러로 치솟았으며, 이 시기에 미국 노예는 70만 명에서 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아프리카 주민들을 미국의 노예상인들이 얼마나 많이 끌고 왔는지를 보여주는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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