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과 서양의 단절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0/01/24 [10:5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0/01/24 [10:58]
동양과 서양의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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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동양의 패자인 중국과 서양의 패자인 로마는 서로간의 문물의 교환하면서 고대에서 중세까지 협력하는 관계였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도자기와 차, 그리고 비단이 서역으로 수출되었고 지나가는 길에 인도의 향료, 후추, 생강 등이 서양으로 전파되었다. 조미료라고는 소금밖에 몰랐던 서양 사람들은 인도에서 전해진 후추와 생강 맛에 길들여져 이들이 없으면 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로마와 중동지역에서 대치하고 있던 파르티아왕국은 로마와는 적이기도 했지만 교역을 위해 서로가 필요한 처지라 국경을 완벽하게 막는 짓은 하지 않았다.
 
동양에서 건네지는 교역품은 고가의 물품들이었기에 소비하는 로마인들이 없다면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로마나 파르티아는 서로가 전쟁을 했을 때 어느 쪽이든 이길 수는 있지만 서로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적이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파르티아 왕국이 무너지고 이슬람세력인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말았다. 이들 이슬람세력들은 기독교 세력들과 교역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서의 교역로에 문제가 생기자 이들 동양에서 들어오는 물품들의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동로마제국이 중동의 교역로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통은 트여 있었다.

1453년 1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에게 멸망하자 중동의 교역로는 이슬람세력에게 넘어가고 말아 사실상 동방으로부터의 물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생강과 후추의 맛에 길들여진 서양 사람들은 이들이 없는 식탁은 상상하지 못할 처지가 되었고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달리니 이들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서양 사람들은 중동을 통하지 않고 인도로 가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488년 포르투갈의 바르톨로유 디아스는 아프리카 해안선을 따라 항해하여 희망봉(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했고 1495년 바스코 다 마가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가는 새 항로를 찾아냈다.

이 항로를 발견함에 따라 아프리카라는 대륙이 얼마나 거대하고 엄청난 가능성은 지녔는가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 당시의 신대륙이란 공식적으로 아프리카를 일컫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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