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왕위를 넘보기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종이 후사가 없다는 점과 서북면을 근거로 구성된 강력한 사병은 어느 무장집단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방원을 부담스러워하는 정종과 방원을 증오하고 있는 태조의 존재는 그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장자를 내세우지 않아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고 보고 정종을 세웠기에 그의 형인 방의가 있는 상태에서 그의 존재는 미약했고 명분이 없었지만 방원에게 정치적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어 “방원이 평소에 나를 시기하여 이에 속절없이 죽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걸고 궐기했다. 그런데 자신에게 전폭적으로 지지를 보내줄 것이라 믿었던 태조가 오히려 자신의 군사행동을 비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풀이 죽고 말았다.
개전초기에는 정종이 보내준 일부 사병을 가담시키며 기세를 올렸지만 이지란, 조영무 등 동북면에서부터 태조를 호종한 경험 많은 무장세력을 거느린 방원에게 패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고의든 아니든 정종의 사병 일부가 방간을 지지해준 사실이 드러나자 정종은 난처해지고 말았다. 이 일을 빌미로 방원은 왕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의 해산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조선 초기 공신들이 소유한 각종 사병들의 해산으로 이어져 그동안 골칫거리였던 사병해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자연스럽게 방원으로 넘어갔다. 방원측은 정종이 후사가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아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게 했다.
방원은 정종의 동생임에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책봉하게 한 것은 장자로 하여금 보위를 잇게 한다는 유교이념에 입각하여 동생이지만 종법을 무시하고 세자라는 형식으로 후계자를 삼음으로 불안한 자신의 장래의 입지를 튼튼히 하려 했던 것이다. 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위하라는 압력이 거세지자 결국 정종은 1400년 11월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의 자리로 물러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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