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09/09/14 [16:54]
정도전과 이성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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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정도전이 생각하는 재상정치 즉 왕은 혈통으로 계승되는 자리이기에 형식상의 존재로 남기고 실질적인 정치는 재상이 맡아야 한다는 정치이론은 지금으로 말하면 내각책임제와 같은 형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하는 재상정치는 혈통으로 이어 내려오는 왕은 훌륭한 인재가 나와 올바른 정치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고 그렇다면 재상이란 훌륭한 인재를 항상 뽑아 쓸 수 있기 때문에 혈통중심인 왕권제보다는 더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도전이 생각하는 재상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똑똑한 왕족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향처인 한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방과, 이방원은 왕자라는 무시할 수 없는 신분을 가진데다 막강한 사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제거해야할 상황이었다. 드디어 정도전 일행은 칼을 빼들었다. 그들이 가진 사병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명목을 들어 사병을 관군에 합쳐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왕자들이 가진 사병들을 관군으로 흡수하여 그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측의 이러한 정치공세는 불만세력들을 긴장시켰고 이런 불만세력들을 이방원은 조직화시켰다. 그는 태조의 이복동생인 이화와 조카인 이천우를 포섭했으며 그리고 동북면에서부터 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조영무와 장사길을 우군으로 끌어들였고 매부인 민무구, 민무질과 하륜, 이숙번등을 포섭하여 진용을 갖추었다. 그러자 방과도 자신의 휘하에 있던 갑사(사병)를 보내 이방원의 오른팔을 자처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던 1398년(태조 7) 7월 태조가 병이나j 지리에 눕게 되자 정도전은 태조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피접을 가야하니 왕자들에게 모두 들어와 문안을 하라고 했다. 이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왕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는 이미 병권이 세자 방석과 정도전에게 있었고 왕자들의 사병은 모두 몰수된 상태였다.

그러나 방원의 부인 민씨는 몰래 사병을 감춰두고 있었고 방원에게 궐기할 것을 권했다. 드디어 왕자들을 들어오라는 명이 떨어지자 방원은 이숙번의 군사 50명을 데리고 정도전의 집으로가 불을 놓았다. 그러나 정도전과 남은은 달아나고 없었다.

정도전은 민부의 집에 숨어 있다가 방원의 종에게 잡혀 죽었고 남은은 자진해서 나와 죽고 말았다. 방원은 재상들을 설득하여 정도전 등이 난을 일으키려해 죽였다고 태조에게 보고하고 태조의 곁에 가있던 방번과 방석을 끌어내어 죽였고 그토록 미워했던 이미 죽은 계모인 신의왕후 강씨를 폐서인했다. 이 사건으로 정도전이 죽음으로 인해 정도전이 꿈꾸어오던 이른바 재상정치는 꽃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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