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3년 (우왕 9)에 정도전은 왜구를 치기 위해 함주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성계와의 만남은 그의 삶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고 이성계의 추천으로 다시 정계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고려 말의 지식인들은 고려를 회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정도전의 스승인 이색과 그와 동문수학한 우현보, 권근, 정몽주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현재의 고려를 어떻게든 회생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아무런 고생도 해보지 않고 말로만 위민을 떠들어대는 이들을 가소롭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고려는 화생 불가능한 노인일 뿐이었다. 이런 고려를 되살리게 위해 하는 모든 일들은 헛수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반대파들이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반대파들이 들고 나온 공격명분은 정도전의 천한 출신내력이었다. 비천한 출신을 문제 삼아 공격하자 결국 정도전은 1391년(공민왕 3) 봉화로 유배되어 비록 다음해에는 풀려나 고향인 영주로 갔지만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이대로 그의 인생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이방원이 정몽주를 격살하여 단숨에 정국을 반전시키자 정도전의 앞날은 탄탄대로로 바뀌었다.
원래 정몽주는 자신들의 동료인 이색, 우현보 등이 반 이성계 노선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다. 정몽주는 회군으로 인한 정국의 전환이 그의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야욕을 불태우던 이성계, 정도전 일행과 자주 충돌하게 되자 정몽주는 그들과 더 이상은 같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정치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즉위 초기 이성계의 세력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공양왕도 정몽주이 세력을 비호하게 되자 이에 힘을 얻은 정몽주는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 시기를 엿보던 중 명나라에 다녀오던 세자 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낙마하여 드러눕게 되자 공양왕을 채근하여 정도전 등 친 이성계파를 파면시켜 귀양보내게 하여 적극적으로 이성계 일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정국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 챈 이방원은 아버지를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고 정몽주를 제거하려 계획했다.
이런 움직임은 정몽주의 귀에도 들어왔지만 보다 확실한 정황을 파악하고자 이성계 문병을 단행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만나고 돌아오는 도중에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내리친 철퇴에 맞아 죽음을 맞게 되어 이성계와 정도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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