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예사조 이론 중에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라고 하는 형식주의 문학의 토대가 된 유명한 이론이 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낯선 것에 대해, 때로는 위기를 감지하며 당혹스러워 하며, 때로는 신선하게 충격받고, 놀라 한발 물러서면서도 강렬한 호기심을 가지고 안전한 지점에 머무르며 훔쳐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 비전시흥포커스 5호를 준비하면서 초현실주의 소개에 앞서 해당 미술사조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면 독자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러시아의 유명한 문학이론가인 빅토르 시클롭스키(Viktor Shklovsky)가 개념화한 ‘낯설게 하기’를 들어 설명해보고자 한다.
우리들에게 ‘친숙한 사람 혹은 친숙한 사물’이란 안전하고 편안함을 준다.
그러나 친숙하다는 것은 대개 금새 따분해지기 마련이어서 심심하기 그지없다. 예컨대 공기와 물은 아무리 소중한 것이더라도 평소에 부족함 없이 넘쳐나도록 존재하면 그 소중함에 대해 망각하며 살아가듯이 친숙함이란 우리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한다. 그것에 창안해 시클롭스키는 친숙한 것을 낯설게 느껴지도록 표현함으로서 문학성을 증명하는 이론 ‘낯설게 하기’를 이론으로 정립한 것이다.
이를테면 수직으로만 추락한다고 생각하는 친숙한 사실이 『수평으로 추락한다?』라고 현상에 역행하는 낯설은 표현을 사용해 본다면? 혹은 진~한 향을 품고 갓 올라온 봄 냉이를 쌈 싸 먹으며 『오물오물 씹히는 봄, 톡톡 터지는 봄』이라고 감각적 표현을 했을 때 열광하는 것처럼, 문학세계에서 ‘낯설게 하기’ 개념은 미술사에 있어서는 ‘초현실주의’ 장르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아도 좋다. 초현실주의 화풍은 표현기법에 있어 ‘친숙함’을 벗어나 표현에 ‘낯설게 하기’를 시도해 선풍적인 관심을 끌며 서양미술사의 흐름에 한 획을 긋고 또 다른 미술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의 경우는 초현실주의 작가로서 어떤 화가를 소개해볼까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대표적 화가를 낚아보라면 가장 먼저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라는 대어가 낚인다. 독자들이 검색창에 초현실주의 키워드로 검색해본다면 포털사이트마다 온통 그의 작품들로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는 페이지들을 수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 소개하는 작품들 또한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하는 생각을 하면서 감상할 독자층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많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중 특히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 재미있는 것은 에드거 엘런포우와의 친분을 나타내듯 무서운 이미지들부터, 풍자화가들처럼 위트 넘치는 재미와 기발한 작품들, 신비스런 몽환적 작품, 철학적 의미와 무의식적 각성이 느껴지는 작품들로 매우 다채롭게 선보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업예술가로서 출발한 그의 과거 이력 때문인지 마치 보는 이로 하여금 냉큼 집어먹기 좋은 과자처럼 감상하기 쉬운 모티브를 제공한다고나 할까? 한눈에 이해하기 쉬운 포스터처럼 대중적 매력을 발산하며 이미지가 쉽게 뇌리에 박히는 특징이 있다.
그의 상상력 가득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한 다음 작품들이 얼마나 생경한 느낌을 주는지 하나씩 살펴보면, 작품1) 『겨울비』는 1953년 작품으로 블랙코트 차림에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하늘에서 비처럼 내린다. 이 모습은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몰 개성화된 인간들의 획일성을 드러내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에 속한다.
작품2) 『개인적 가치』 작품도 빗, 침대, 붓, 유리잔 등이 각각 크기가 현실 사이즈를 벗어나 제멋대로 그려진 상태에서 부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천정만 남겨둔 채 벽마저 사라져 이곳이 실내인지 허공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작품3)『이미지의 반역』의 경우도 그냥 단순한 하나의 파이프지만 그 속에 있는 글씨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문구를 통해 파이프 그림이지만 파이프가 아니라는 이미지의 반역을 꾀하고 있다. 작품4) 캔버스 안의 나무 풍경이 실내 장면인지 바깥장면인지 알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나, 작품5) 그의 죽기 전 마지막 작품으로 사람의 몸통이 빠져나와 커다란 얼굴을 형성해 버린 우스꽝스런 모습의 『삶의 예술』작품도 이질감을 주기에는 다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위적 예술로서의 초현실주의 작품들은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하다.
벨기에 출신의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아주 익숙한 것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로테스크하게 비틀어 현실 감각을 왜곡시킨 상태로 뒤흔들어 보여준다.
화가의 꿈을 꾸기에 앞서 그는 당초에 그래픽 아트를 배워 포스터, 광고 디자인, 벽지디자인 등 직업전선에서 생계형 상업미술가로 활동했으나, 어느날 이탈리아 형이상 화가인 지오르지오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의 복제그림을 접하고 나서, 큰 충격을 받고 초현실주의 화가의 세계로 전향한다.
키리코의 작품6) 『사랑의 노래』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이 작품 또한 흥미롭다. 삭막해 보이는 건물 벽면에 고대 그리스의 두상과 수술용 장갑을 비정상적인 크기로 놓고, 쌩뚱 맞은 녹색 공을 배치해 보는 이로 하여금 <저게 왜 저자리에 놓여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서로 그 어떤 관련성이 없다. <저런걸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제목으로 눈이가는 순간 거기에 붙어 있는 제목이야 말로 최대 혼란의 정점을 찍어주듯 『사랑의 노래』라는 딱지를 붙인채 감상자를 비웃는다. 이 키리코의 작품에 비하면 차라리 르네의 작품은 일정한 의미가 느껴지고 무질서 속에서도 일정한 질서감이 곳곳에 존재한다.
초현실주의 사조의 뿌리가 키리코로 정의 된다는게 정설이라고 보면 그가 초현실주의 화가라고는 하나, 최소한 <대체 그림이라는 것이 뭐야?> 라고 의문을 갖게 하면서 그를 시대를 초월한 유명화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 이작품 『사랑의 노래』는 1차 세계대전 후 기존 예술과 가치를 파괴하고자 하는 예술적 허무주의인 다다이즘의 발로에서 나온 작품으로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초현실주의 작품은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해 기존의 가치를 파괴 함으로서 새로운 자유와 가치를 창조해보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미지의 반역』과 같은 철학적 메시지가 분명하게 포함돼 있다.
얼핏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한줄기로서 비슷해 보이지만 미술사조에 있어서는 분명한 구분을 두고 있다. 실제 르네의 작품들을 보면 사물들을 전혀 다른 위치에 배치해서 서로 상반된 이미지 관계들에 의문을 제기하며, 두 이미지 간 괴리를 극명히 드러내 보이지만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해 상식에 도전하는 동시에, 사물의 가치를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기존질서 파괴에 중심을 둔 다다이즘과는 달리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철학적 의로를 분명히 드러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자 시도했다.
초현실주의를 표방하던 당대 동시대인들로는 르네 마그리트를 비롯해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 호안 미로, 백진스키, 마르크 샤갈, 이브 탕기, 마르셀 뒤샹 등 이외에도 많은 작가들에이 활동했으며, 1960년대 팝아트 영역의 전환되는데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한 현대미술에 있어서도 당시 형식에 치우치고 있던 입체파의 대안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회화적 전통의 맥을 잇고, 서양미술사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작품해석 : 주간시흥 추연순 취재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