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창의 난(4)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9/03/24 [15:12]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9/03/24 [15:12]
김헌창의 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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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주간시흥신문
헌덕왕대에 이르러 김헌창은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무렵 신라의 경제는 매우 어려워 옛 백제 지역에 기근이 들어 815년(헌덕왕 7)에는 농민들의 반발이 일어났지만 중앙정부는 군사를 보내 토벌을 했을 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아 지방민들의 불만이 커져만 갔다.

더군다나 신라의 지배체제는 근본적으로 골품제에 입각하여 관료제도를 운영했으므로 6두품 이하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승진에 한계가 있었으며 더군다나 지방인들은 중앙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의 보조역할을 할 뿐 중앙으로의 진출은 막혀있었다.

이런 사정을 김헌창은 지방의 관리로 재직하면서 알게 되었고 불평을 품은 지방의 관리들과 폭넓은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중앙에서 벌어지는 관력투쟁을 지켜보았을 때 중앙에서 정변을 통해 정권을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던 중 헌덕왕의 동생 김수종이 태자로 책봉되어 후계구도가 확정되자 옛 백제 땅인 웅진주에서 새 왕조의 수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장안(長安)이라고 했으며 연호를 경운이라고 했다.

김헌창에 동조한 지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무진주, 청주는 물론 완산주(전주), 사벌주(상주) 등의 도독과 국원경(충주), 서경원(청주), 금관경(김해)의 장관 등을 비롯한 많은 군현의 수령들이 호응하였다. 그런 가운데 완산주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최웅과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왕경으로 도망쳐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리자 헌덕왕은 이들에게 상을 내린 뒤 진압군을 편성하였다.

비록 진골 귀족들은 내부에서 서로 권력다툼을 하고는 있었지만 지방에서 별도로 왕조가 출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강한 위기감을 느껴 서로를 결집 시킬 수 있었다. 김헌창은 휘하 장수들을 시켜 중요한 길목을 지키게 했지만 도동현(영천)에서 첫 패배를 맛보았고 삼년산성(보은)에서도 패전하여 속리산으로 도망쳐 갔지만 뒤따라온 진압군에게 섬멸당하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김헌창의 군사는 승승장구하던 진압군을 공주부근에서 대적하다 크게 패하자 김헌창은 겨우 몸을 빼내 웅천주 성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포위 공격이 10일 가량 계속되어 성이 위태로워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진압군의 핵심세력은 헌덕왕의 측근인 진골세력들의 사병들이었고 그들은 반란군을 진압 한다는 명분으로 약탈과 살육을 일삼아 김헌창의 난을 계기로 신라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갔다.

김헌창의 난은 진압된 후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아 <삼국사기>에는 이 난을 진압한 직후에 일어난 비정상적인 자연현상을 여러차례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다.

김헌창의 야심이 좌절된 3년 뒤인 825년(헌덕왕 17)1월. 김헌창의 아들인 김범문은 다시 재기를 노리고 고달선적, 수신 등 100여명과 함께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자 한산주(서울)를 치다가 군사들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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