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은 재위 6년 만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후사를 두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다시금 왕위를 둘러싼 권력투쟁이 휘말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인물은 원성왕으로 내물왕의 12세손인 김경신이었다. 김경신은 혜공왕 말년에 김양상이 군대를 일으켰을 때 적극 가담한 인물이긴 했지만 왕위 계승 서열로 보면 무열왕의 후손인 김주원보다 아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권에 의하면 원성왕이 왕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김경신은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선덕왕이 죽었을 때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김주원의 집이 북천 북쪽 20여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나 김주원이 건너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임금의 크나큰 지위에 나아가는 것은 본디 사람이 도모할 수 없는 것이니 오늘 폭우가 쏟아지는 것은 아마도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하지 않기 때문이니 지금의 상대등 경신이 평소에 덕망이 높아 임금의 체모를 가지고 있으니 왕으로 모십시다.”라고 말하여 경신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후세의 사가들이 경신이 왕위에 오른 경위를 미화시켜 말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주원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경신이 중신들을 설득했거나 아니면 위협을 했던가 해서 왕위를 이은 것으로 보여 진다.
강물이 불어 궁성에 가지 못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김주원이 바로 김헌창의 아버지이다. 어쨌든 김주원은 왕위쟁탈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려면 정계를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주원은 외가쪽 연고지가 있는 강릉으로 갈수밖에 없었다.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자가 된 원성왕의 당면한 과제는 즉위과정에서 빚어진 갈등을 해소하여 정치적 안정을 빨리 꾀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왕이 된 이듬해에 바로 김주원에게 ‘명주군왕’의 칭호를 내리고 영양, 삼척, 평해, 울진 등을 식읍으로 인정해주어 왕에 오르지 못한 그를 위로하여 반발을 무마하려 했다. 게다가 원성왕은 그동안 후계자가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왕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즉위하자마자 큰아들 인겸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를 명확히 했다.
그러나 인겸이 7년 만에 죽어 둘째 아들 의영을 태자로 삼았으나 그 역시 2년 만에 죽고 말았다. 결국 인겸의 아들인 준옹을 태자로 세웠지만 원성왕이 준옹을 태자로 세운지 1년 반 만에 죽어 13세의 어린 나이로 준옹이 애장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여전히 왕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애장왕의 나이가 어리기에 정권은 애장왕의 숙부인 김언승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어린 조카의 후견인으로 실질적인 권력행사를 하다가 애장왕이 장성하자 스스로 정변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이 인물이 바로 헌덕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