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켜야 했던 신라는 이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족과 귀족들의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왕권도 나이가 어린 왕이 등극한다거나 왕위를 이을 마땅한 적자가 없을 경우에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김춘추의 자손들이 왕위를 이어 받아 큰 무리 없이 나라를 다스렸으나 경덕왕 대에 이르러서는 아들이 없어 그동안 누려온 정치적 안정이 깨질 우려가 있었다. 그렇기에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즉위한 이듬해에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첫째부인을 내쫓고 새장가를 들 정도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설화는 그가 얼마나 간절히 아들을 원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이 아들을 간절히 원해 표훈대사를 불러 아들을 얻게 해달라고 하자 표훈대사가 말하기를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고 했다. 왕이 말하기를 “딸을 아들로 바꾸어 주시오.”하자 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청하자 천제가 말하기를 “할 수는 있지만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왕에게 전하니 왕은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잇고 싶소.”라고 하여 왕후가 아들을 얻으니 매우 기뻐하였다. 이 아들이 바로 8세 때 즉위한 혜공왕으로 왕의 나이가 어려 태후가 섭정했지만 나라가 위태로웠고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주머니를 차는 것을 좋아한 나머지 나라가 크게 위태로워 결국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시해되고 말아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혜공왕이 여덟 살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하는 불안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신라에서는 진골귀족이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기 때문에 왕권을 찬탈당할 개연성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768년 여름 반란을 일으킨 자들이 왕궁을 한 달이나 넘게 포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연이어 역모사건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렇게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780년 김지정 등이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자 김양상이 이들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혜공왕과 왕비가 살해되고 말았다. 혜공왕이 살해되자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했다. 선덕왕은 내물왕의 10대손으로 왕족으로 태어나기는 했으나 왕위를 승계할 신분은 아니었다. 김영상은 혜공왕 13년에 상소를 올려 시국을 극렬하게 비판하여 혜공왕과 왕당파를 몰아쳤다. 그러자 왕당파인 이찬 김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켜 대궐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에 김양상은 역혁명을 일으켜 혜공왕과 왕비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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