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도의 반란 - 흠돌의 난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9/03/04 [15:33]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9/03/04 [15:33]
화랑도의 반란 - 흠돌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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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화랑도는 신라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단체임은 물론 삼국을 통일하는데에도 지대한 공을 세웠던 단체이다. 이런 화랑도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흠돌이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편에 따르면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소판 김흠돌, 파진찬 홍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꾀하다 처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흠돌이라는 인물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정비인 문명태후의 조카로 김유신이 죽은 뒤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김춘추의 아들인 문무왕도 흠돌의 막강한 권력을 무시할 수 없어 흠돌의 딸을 태자(신문왕)비로 삼아 타협점을 찾으려 했을 정도였다.
 

불화가 싹트기 시작한 이유는 자의라는 여인 때문이었다. 자의는 파진찬 선품과 보룡사이에 낳은 딸로 인물이 매우 뛰어났다. 이런 자의에게 흑심을 품은 흠돌이 자의를 첩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보룡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흠돌은 노골적으로 보룡에 대한 험담을 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자의가 법민에게 시집가 법민이 태자에 오른 뒤 태자비에 책봉되자 자의의 보복을 두려워한 흠돌은 이모인 문명왕후를 찾아가 자의를 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 자의가 진골정통계통이기 때문에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었을 경우 진골정통계열이 중용되어 가야파의 힘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고 했다.

문명왕후는 흠돌의 말을 옳게 여기고 태자의 후비로 있던 김유신의 딸 신광을 태자비로 삼으려 했으나 태자 법민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자 법민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의는 왕후가 되었다. 하지만 흠돌의 세력이 막강하여 건드릴 생각을 못했다. 흠돌은 이모인 문명왕후(법민의 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는데다 흠돌의 부인 진광은 김유신의 딸이고 후비인 신광의 언니였기 때문에 자의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오히려 문명태후의 입김으로 흠돌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야만 했다.

흠돌의 딸이 태자비가 되면서 흠돌과 자의왕후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흠돌은 딸을 앞세워 태자를 휘두르려 했고 그것을 앞세워 자의왕후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681년 문무왕이 죽음을 앞두자 흠돌은 조정을 좌지우지 했다. 심지어는 태자 정명(신문왕)을 내쫓고 후비인 야명부인의 아들인 인명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이런 흠돌을 견제하기 위해 자의왕후는 김대문의 아버지인 오기를 불러들였고 그 와중에 문무왕이 죽고 말았다.

문무왕이 죽자 흠돌은 인명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됐고 신문왕은 이런 흠돌과의 힘든 세력 다툼 벌여야 했다. 제26대 진공, 27대 흠돌이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였기에 흠돌을 지지하는 세력에는 당연히 화랑도들이 많았다. 이들에 대항하기 위해 오기는 순원, 개원, 당원, 원수, 용원공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을 불러 모아 흠돌에 대항하자 놀란 흠돌이 진격하여 대궁을 포위했다.

하지만 왕을 지지하는 오기공 등의 세력에게 패하여 반란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자의태후는 화랑을 폐지하라고 명령하고 오기공으로 하여금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화랑제도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전과 같은 세력은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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