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 (2)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12/08 [12:27]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12/08 [12:27]
서동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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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위소왕파와 법왕파의 권력다툼 속에 살아남은 왕족이 거의 없어 사생아인 서동이 무왕으로 등극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위소왕과 아좌태자가 살해될 때 다른 왕자들도 모두 살해되었다고 보여지며 무왕은 궁궐 밖에서 서민의 신분으로 살았기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법왕을 제거한 위소왕파가 법왕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할리는 만무하기에 무왕은 위소왕의 사생아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왕이 등극하기 전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부르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내용은 사실일까? 그 당시 신라왕은 진평왕으로 진평왕은 마야왕후로부터 천명공주와 덕만공주를 얻었고 승만왕후와의 사이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자가 있었을 뿐 선화공주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천명공주는 진지왕의 맏아들 김용수에게 시집갔는데 실은 용수보다는 그의 동생인 용춘을 더 좋아했다. 이 사실을 안 용수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동생인 춘추에게 천명을 받아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자 용춘이 이를 받아들여 천명과 그의 아들인 춘추를 부인과 아들로 삼았다.

원래는 천명이 왕위계승자였지만 진평왕은 덕만을 총애하여 그녀에게 양보하도록 하여 진평왕이 죽자 제27대 선덕여왕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무왕은 신라와 사돈지간이 된 셈인데 어찌된 일인지 무왕이 등극한 이후로 신라와 백제와의 관계는 더욱 험악해져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진평왕은 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천명공주에게 양보할 것을 요청했는데 만약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었다면 선화공주에게도 양보를 부탁하는 기록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라고 볼 수 없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서동이 금맥을 발견하여 신라에 보내 진평왕의 신임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는데 당시 신라와 백제는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마치 원수처럼 지내고 있을 때여서 신라왕의 도움으로 서동이 왕위에 올랐다는 얘기는 설득력이 없다.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누구인가? 만약에 선화공주가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백제의 공주라면 얘기가 성립할까?

서동이 선화공주를 꾀려고 노래를 퍼트렸을 때 진평왕이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다고 했는데 만약 선화공주의 아버지가 신라의 진평왕이 아니고 백제왕이었다면 정적의 아들과의 불미스러운 소문에 귀양을 보냈을 수도 있다.

만약 선화공주의 아버지가 진평왕이 아니고 백제의 법왕이라면 서동은 자연스럽게 법왕의 사위가 되어 왕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된다. 삼국사기에서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무왕은 법왕과 어떤 관계임에는 틀림없다고 본다.

백제는 8대 가문이 통치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무왕이 등극한 이후로는 8대 가문이 고루 등용되었고 이들 간의 파벌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선화공주가 신라왕의 딸이 아니라 백제왕의 딸이어서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가문과의 관계가 서로 맺어져 무왕을 중심으로 뭉쳐져 파벌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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