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랑과 망해사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11/01 [17:58]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11/01 [17:58]
처용랑과 망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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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신라 제49대 헌강왕 시절은 서울인 서라벌부터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아 있었으며 초가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나라가 번성한 시절로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런 태평한 시절에 왕이 개운포로 놀러갔다가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주변을 덮어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변고에 대해 주위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이 아뢰기를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왕이 용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짓도록 명령을 내리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동해의 용은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한 다음 그 중 처용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을 왕을 보필하라고 하며 딸려 보냈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벼슬까지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워 역신마저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 와서 자고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늦게 돌아온 처용이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갔는데 그 노래가 바로 처용가이다.

동경 달 밝은 밤에 밤새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그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지금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나라 사람들은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쳤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영취산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처용을 위한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기이편에 수록되어 있는 글로 여기서 궁금한 것은 처용의 정체이다.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처용은 아랍지역에서 온 의사였다고 한다. 처용이 아랍인이었다면 그 시대에 이미 신라와 아랍간의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신라시대의 유물 중 유리구슬이 등장하는 보면 유리는 서양에서 생산되는 품목으로 이 유리가 아랍지역을 거쳐 신라까지 들어왔다고 한다면 아랍인들과의 교역이 충분히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부터 아랍인들과의 교류가 있었다면 고려시대에도 이어졌고 그 후손 중 일부가 한반도에 자리 잡아 쌍화점에 나오는 회회아비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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