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청국이 조선을 돌볼 수 없다고 생각한 일본은 조선내의 친일파를 부추겨 정변을 일으킨 사건이 1884년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다.
청국은 안남을 놓고 프랑스와 격돌하면서 임오군란 이래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3천명중 1천5백병을 빼내갔다. 이런 정세를 알아차린 일본은 전에 개화당이 요청했다 거절당한 300만엔의 차관은 물론 병력까지 제공하겠다고 김옥균 일당을 부추기자 그렇지 않아도 수세에 몰리고 있던 김옥균 등이 사건을 일으켰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우정국(지금의 종로구 견지동 체신기념관 자리)으로 우정국 낙성 축하연이 벌어지던 10월 7일(양력 12월 4일)로 거사의 주역들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교,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등이었다.
이들은 우정국 근처에 불을 질러 연회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창덕궁에 들어가 국왕을 경우궁으로 모신 다음 일본공사에게 연락해 일본군의 보호를 요청하고 그날 밤 개화당은 곧바로 정적의 제거에 들어 갔다. 변란 소식을 듣고 고종을 알현하고자 입궐했던 한구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와 궁중 내시 유재현 등의 수구파 인물과 척족 인물 일부가 밤에 희생되었다.
다음날 아침 개화정은 왕비의 요청에 따라 좁고 기거가 불편한 경우궁 대신 계동궁(이재원의 집)으로 고종의 거처를 옮기고 새정권을 수립했다.
좌의정에 이재원, 우의정에 홍영식, 전후영사겸 좌포도대장에 박영효, 좌우연사겸 우포도대장에 서광범, 호조참판에 김옥균, 도승지에 박영효, 병조참판겸 정령관에 서재필, 참의교섭통상사의에 윤치호, 동상에 변수, 좌찬성에 이재면, 병조판서에 이재완, 평안도관찰사에 이재순, 공조판서에 홍순형, 판의금에 조경하, 예조판서에 김윤식, 형조판서에 윤웅렬, 한성판윤에 김홍집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개화당은 그날 오후 5시에 불편을 견딜수 없다는 왕비의 불평에 따라 방어에 유리한 계동궁을 떠나 원래의 창덕궁으로 옮겼다. 넓은 창덕궁은 개화당의 소수병력으로는 방어하기에 불리하여 김옥균 등이 반대했지만 일본공사는 일본군 만으로 청국의 공격을 격퇴할수 있다고 호언하는 바람에 할수없이 옮기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태는 정변주역의 판단과는 달리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정변이 일어난 다음날 청군은 즉각 개입하여 국왕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을 향해 대포를 쏘며 무지막지한 공격을 감행했다.
사태가 여의치 않자 일본군은 도망쳐버렸고 쿠테타군은 삽시간에 무너졌다. 창덕궁 북장문으로 탈출하여 끝까지 국왕을 배종하던 홍영식,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피살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등은 간신히 도망쳐 일본공사 일행과 함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달아나는 이들은 백성들이 도처에서 공격을 해대 계속 쫓기는 신세였다.
11월21일(양력12월 8일) 가까스로 인천에 도착한 이들은 24일(양력(11일) 세이코 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허무한 3일천하의 끝이었다.
갑신정변의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은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군함 7척과 육군 2개 대대를 거느리고 인천에 입항한 이노우에는 호위병을 대동한 채 서울에 들어와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조선정부가 사죄하고 배상금 11만엔을 지불하며 일본공사관 신축비 2만엔을 부담한다는 조건의 적반하장격인 ‘한성조약’이 1884년 11월 24일 맺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