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고종 22) 3월 1일 영국의 동양함대 사령관 도웰이 이끄는 3척의 군함이 한반도 남해상의 거문도를 전격 점령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 청국주재 영국공사 오코너는 러시아의 불법에 대비한 조치로 잠시 거문도에 정박한다고 조선정부에 통고해왔다.
이로부터 영국, 중국, 러시아, 조선 사이에 외교적 갈등이 시작되다가 1887년 2월 27일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했다.
거문도는 서도, 동도, 고도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졌는데 가장 큰 서도가 동도와 함께 고도를 감싸고 있어 동남쪽에 보지 않으면 한 개의 섬으로만 보이고 여수와 제주도를 잇는 수로의 중간에 위치하여 대한해협 및 대마해협을 항해하는 선박들의 동태를 관찰하기에 적절한 위치여서 거문도는 전략적으로 훌륭한 군항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한 나라는 영국과 러시아로 1845년(헌종 11) 영국군함 사마랑호가 남해일대를 탐사하면서 거문도에 들려 해밀턴 항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러시아도 1865년(고종 2) 푸차친 제독이 거느린 7척의 군함이 조사한 바 있었다.
그런데 영국이 이 시기에 거문도를 점령한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발발한 아프가니스탄 분쟁이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으로 1885년 봄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그해 2월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요지인 메르브를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남하하여 3월 말경에는 또 하나의 요지인 펜제를 점령함으로써 영국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대로라면 러시아는 인도양으로 진출할 길을 뚫게 되는 것이어서 이에 영국은 하원에 추가예산을 요구했고 해군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러시아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취약한 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멀리 떨어진 블라디보스톡 군항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자면 이를 공격하기 위한 동북아지역의 군사기지가 필요해서 거문도를 점령하여 블라디보스톡을 공격하기위한 함대의 기지로 삼기위해 점령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