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아편전쟁(에로호 사건)

주간시흥신문 | 기사입력 2008/08/18 [20:20]
주간시흥신문 기사입력  2008/08/18 [20:20]
제2차 아편전쟁(에로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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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영국 국적이지만 중국인이 소유한 에로호는 아편밀수선으로 1856년 10월 8일 광주의 해주도 강가에 정박해 있다가 광동수사의 순라선에 임검을 당해 이명태가 해적용의자로 체포되고 11명이 연행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에 대해 광주주재 영국영사는 “영국 국기를 내건 영국국적의 배를 청국관원이 임의로 임검하고 사람을 체포한 것은 명백한 조약위반이므로 즉시 체포된 인원을 석방하고 보상함과 동시에 사과해야 한다.”라고 항의했다. 이 사건은 영불 연합군의 청국원정을 야기 시킨 결과가 되었지만 사실 여러 외국은 다시 한 번 청국을 혼내주어 더 유리한 조약을 맺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는 카톨릭신부 샤프드렌이 중국인 신도를 선동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죄로 사형당한 일에 대하여 청국 정부에 책임을 묻고 배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일도 샤프드렌이라는 신부가 청국의 법을 무시하고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기에 청국으로서는 책임이 없는 일이었다.

영국은 에로호의 일을 프랑스는 샤프드렌의 일을 빌미로 연합하여 청국에 출병하기로 합의했다.
1857년 12월 영불 연합군 5천6백 명은 광주로 진격하여 29일에 함락시키고 약탈과 폭행을 일삼으며 북상하자 청국은 광주로 돌아가서 광주의 신임 총독과 얘기하라고 했으나 영불연합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북상하여 1858년 4월 함대가 천진 어귀에 도착한 다음 북경의 조정을 향해 교섭에 임할 친권대사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협박하자 청국정부는 광동, 복건에서 추가로 두 항구를 개방하고 세금도 절감해주겠다고 하며 물러가라고 했지만 영불 양국의 전권대사는 이 제안을 무시하고 5월 30일 천진에 도착하자 청국정부는 할 수 없이 대학사인 계량과 이부상서 화사납을 흠차대신으로 파견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요구는 다음 7개항이었다.

1. 사신을 북경에 상주시킬 것.
2. 원정군의 비용 및 광주 양관 방화의 손해를 배상 할 것.
3. 중국내륙의 통상, 여행, 장강의 통상을 개방할 것.
4. 기독교 선교사, 신도의 보호, 포교, 신교를 금지하지 않을 것을 서약할 것.
5. 세율 개정을 위한 위원을 임명할 것.
6. 해적진압을 위한 협력과 원조를 할 것.
7. 청국에 보내는 영국의 공문서에 영문을 채택하고 조약은 영문의 정식문서로 할 것.

청국정부는 영불의 모든 요구를 수락하고 조약을 맺어 영국이 1858년 6월26일 프랑스는 그 다음날 조인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국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유럽 열강들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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