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갑신정변 (4)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7/01/26 [12:06]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7/01/26 [12:06]
한국근대사 - 갑신정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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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신정부는 126일 아침 국왕의 재가를 얻어 열네 개의 혁신정강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청국에의 조공폐지와 독립강화, 양반신분제도의 폐지와 국민평등 실현, 문벌제도 폐지, 재정과 정계개혁, 환곡제도의 영구폐지, 정부기구의 개혁과 내각제도 실시, 교육제도의 개혁, 상업제도의 개혁, 경찰제도의 개혁, 군사제도의 개혁 등이었다. 고종은 신정부의 요청에 따라 그날 오후 3시에 혁신정치를 천명하는 대정유신조서를 공표했다.

청군의 원세개가 126일 아침 창덕궁으로 환궁해 있던 고종과 다케조에에게 군사작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자 일본의 외무대신은 다케조에에게 황급히 훈령을 하달했는데 그건 일본군을 개화파의 정변에 절대로 가담시키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일본 정부는 청불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청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정책을 급선회했던 것이다.

개화파에 남은 것은 임금뿐이어서 김옥균은 고종에게 함께 인천으로 가자고 요구했다. 인천으로 가기만 하면 일본의 지원을 다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잘하면 일본까지 데려가 망명정부를 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만 김옥균의 요구에 고종은 배신감을 느껴 개화파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의 강대한 힘을 꿈꾸었던 김옥균은 이렇게 고종과 작별했다.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등이 김옥균과 함께 후퇴하는 일본군을 쫓아갔다. 고종의 곁에는 청군과 군중들에게 목숨을 잃게 될 홍영식, 박영효만이 남았다. 일본인과 개화파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보이는 대로 습격을 당했고 김옥균의 집과 일본공사관은 성난 군중의 손에 불타올랐다.

126일 오후 3시경 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다케조에는 후퇴를 결정해 127일 오후 공사관을 탈출하여 128일 인천에 도착해 1211일 일본 우편산 치도세마루를 타고 나가사키로 떠났다. 결국 갑신정변은 약 2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혁명이 실패한 뒤 최후까지 국왕을 수행했던 홍영식, 박영교 등 일곱 명은 청병에게 참살 당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혁로, 변수, 이규완, 장난교, 신응희 등 아홉 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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