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국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지배가 더욱 심화되자 급진개혁파와 고종은 청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청국의 견제세력으로 이용하고자 러시아 측과 접촉 끝에 1884년 7월 전격적으로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개화파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점점 더 강해지는 보수파의 압박으로 인해 큰 정치적 위기에 몰리게 되자 급진개화파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자주권의 회복을 결심하여 정변이라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게 바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기념축하연에서 단행된 갑신정변이었다.
1884년 안남(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가 대립하여 청국이 서울 주둔 청군 3,000명 중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킨데 이어 6월에는 안남에서 청불전쟁이 일어났고 8월에는 프랑스 함대가 청국의 복건함대를 격파하자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내부사정도 정변을 재촉했다. 1881년부터 불거진 개화파와 수구파의 불신과 대립은 1884년에 이르러 극에 다다랐고 특히 개화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민영익이 보빙사의 정사로 미국과 유럽에 다녀온 후 수구파로 전향하면서 개화파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민영익은 외아문협판을 사임하고 한규직, 이조연, 윤태준과 함께 군대통솔권을 장악하고 서울 주둔 청군과의 유대를 강화시켜나가면서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군에서 축출하는 등 개화파 활동을 제약하면서 개화파와 민영익은 함께 국사를 논할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1884년 10월 30일 1년 전 휴가차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서울로 귀임했다. 그런데 개화파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예전의 다케조에가 아니었다. 일본의 조선정책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청불전쟁을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 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 개화파를 침략의 통로로 이용하기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런 변화는 다케조에가 개화파를 대하는 태도에 그대로 반영되어 정변을 꿈꾸었던 개화파는 크게 고무되었다.
개화파는 충의당 계원 약 40여명, 사관생도 13명, 조선군 약 1,000명 등 총 1,050명가량의 무력을 준비하여 1,500명의 청군에 대항하고자 했는데 다케조에는 개화파에게 일본공사관 호위군 150명을 빌려주겠다고 먼저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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