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갑신정변 (1)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11/22 [15:18]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11/22 [15:18]
한국근대사 - 갑신정변 (1)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 주간시흥

급진개혁파의 활동은 18828월 박영효가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하게 된 뒤부터 활발히 전개되었다. 박영효 일행의 일본행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가 확실하게 분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18824월에 별시문과는 또 한 명의 급진개화파의 정치적 발판을 만들어주었는데 그는 바로 최연소 합격자인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18835월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유년학교에 유학하는 열네 명의 생도단 대표를 맡아 도야마 육군학교를 다닌 뒤 18847월에 귀국해 갑신정변에 합류하게 된다.

188212월 신분에 구애 없이 사족들도 농공상에 종사할 수 있다는 국왕의 전교 이후 상인에 대한 인식변화가 이루어지면서 보부상 조직에 사족층이 집중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보부상의 정치세력화를 가속화시키는 중요 이유가 되었는데 이런 보부상의 조직역량에 주목한 조선 정부는 이들을 군대 조직으로 흡수하려 했으며 18834월 보부상 조직이 군대의 최고 지휘관인 삼군부에 편입된 것도 바로 이런 취지에서였다.

18837월 관제가 개편되면서 보부상을 통리아문에 소속시켰다가 해상공국을 설립하여 여기에 소속시켜 보부상을 상업을 하는 동시에 군과 경찰업무에 동원했는데 나중에 갑신정변의 정령에서 해상공국을 혁파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미수호조약 이후 조선은 불과 2주일 만에 조영수호통상조약과 조독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런데 영국이 비준을 거부하고 새 조약을 맺자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기존 조약으로 러시아의 한반도 침투를 저지하겠다는 목적은 일단 달성했지만 경제적 욕구충족에는 미흡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박영효와 김옥균 등 개화파는 18828월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수신사에 체류하게 된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 외무성의 주선으로 주일영국공사 파스크를 예방했다. 파스크는 자신을 찾아온 개화파를 설득하여 18831126일 조영신조약에 서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조영신조약은 조선에 너무 불리한 조약이었다. 무엇보다도 관세율이 이전 조약의 절반정도로 인하되었는데 더 큰 문제는 이 세율이 영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어서 이미 조약을 체결한 독일, 일본, 미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수교가 이루어질 나라에도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조영신조약은 이후 조선의 관세수입에 엄청난 손실을 안겨주어 재정을 악화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네이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간시흥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