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봄 전국적인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7월에 접어들면서 영의정 홍순목은 흉년 때문에 백성들에게 심각한 우환이 있을 것을 예측했고 일본공사 하나부사도 쌀값폭등에 따른 폭동을 예상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은 민씨 일족 정권의 무능과 부패로 국고가 바닥나는 극한상황에 처해있었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는 백성들은 화적으로 내몰렸고 횃불을 들고 다니며 부호들을 습격하는 무리들로 변해 수 십 명이상의 규모로 일정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882년 7월 18일은 군인들의 봉급날이었다. 구식군대의 병졸들은 개항 뒤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1년 넘게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번공사 하나부시의 권고로 1881년 창설된 별기군은 양반자제 80명을 사관생도로 교육시킨 최신식부대로 신신군대를 창설하는 대신 구식군대는 5영에서 2영으로 감축해 수많은 군인들이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구식군대의 병졸들이 13개월 만에 한 달 치 급료라며 받은 건 무게를 늘리기 위해 물을 부었거나 모래가 섞인 쌀이었다. 이에 군졸들은 격분해 7월19일 들고 일어났다. 처음에는 몸싸움 수준이었지만 7월 23일에는 대대적 시위로 발전했다.
정부가 처음부터 합리적으로 대치했다면 일어나지 않을 봉가였다. 각종 공납미를 맡는 관청인 선혜청 당상 민겸호는 난동에 앞장선 병사 네 명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는데 체포되면 사형 당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들은 병사들이 거리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군부 실력자인 무위영 대장 이경하의 집으로 달려가 민겸호의 비행을 규탄했지만 돌아온 것은 해산 명령 뿐이었다.
해산명령을 들은 군졸들은 성난 군중과 합세해 이경하의 부하 여러 명을 살해 한 뒤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여 방화했다. 일이 이렇게 커지자 불안해진 주동자들은 대원군을 찾아갔다. 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대원군은 표면상으로는 달래는 한편 그들에게 밀지를 내려 활동을 장려하자 주동자들은 자신감을 갖고 일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반일감정이 극에 달해있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성난 군중들이 서울을 점령하며 일본공사관을 습격하자 일본공사 하나부사와 공사관 직원들은 비밀서류를 파괴하기 위해 스스로 공사관에 불을 지른 뒤 간신히 인천 제물포항으로 도망쳐 영국군함 플라잉피시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귀국했다.
다음날인 7월 24일 1만여 명으로 불어난 성난 군중들은 영의정 출신이자 대원군의 둘째형 이최응의 집을 습격하고 이최응을 처단하는 한편 창덕궁도 함락시켰다. 군중들은 궁궐에 도피하고 있던 민겸호, 김보현 등을 처단하고 민비를 쫓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 군란으로 민겸호, 김보현, 이최응 등 판서급 이상 고관 여섯 명과 시전상인 100여명, 일본낭인 열세명이 살해되어 사태수습이 어려워지자 고종은 7월 25일 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해 전권을 위임하여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