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개방의 물결 (3)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10/21 [11:47]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10/21 [11:47]
한국근대사 - 개방의 물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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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장이 조선 문제를 맡게 된 것은 1879년 일본의 류큐병합 때문인데 류큐는 일본과 중국의 중간지점에 놓여있는 곳으로 오래전부터 류큐는 중국은 우리의 아버지이고 일본은 우리의 어머니이다.”라는 식으로 양측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879년에 일본이 독단적으로 병합하여 오키나와현으로 개칭하고 일본영토로 만들어버렸다.

이에 놀란 청국은 조선문제를 그간 종속관계로 취급하던 부서인 예부에서 중국의 대외관계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에게로 이관시켰다.

슈펠트는 조선문제에 관한 수장인 이홍장과 1880826일 제1차 텐진회담을 시작으로 1882319일에서 422일의 제4차 회담을 통해 조미수호에 대한 당사자인 조선은 배제시킨 채 최종 합의를 성사시켰다. 청나라는 일본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정부가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통상조약을 맺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아 조약을 성사시켰다.

1882522일 조선은 제물포 화도진 언덕에서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1조는 일방이 제3국에 의해 강압적 대우를 받을 때 다른 일방은 중재한다.”는 내용으로 조선은 여기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는 이 조항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이홍장은 조선은 청의 속방이라는 조문을 조약안에 넣으려했고 조선의 조정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지만 미국의 끈질긴 반대로 이 조항의 삽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미조약 체결에 있어 청국 이홍장의 끈질긴 조선종주권을 주장했지만 조선왕조를 주권독립국가로 인정하고 대등한 주권국가의 위치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조선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청산하고 주권독립국가로 새 출발을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조미조약에서 최혜국대우권을 얻었는데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의 이권침탈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영국은 1883년 조영조약을 맺어 서울에서 상점을 개설하는 권리를 얻었는데 이 권리를 얻지 못했던 미국은 최혜국대우조항 덕분에 영국이 새로 획득한 개설권을 자동적으로 얻게 되었다.

1876년 이후 해안을 따라 전국 각지에 개항장이 들어섰는데 1882년에는 서울까지 개방함으로써 외국군인은 물론 외국 상인까지 서울에 거부하기 시작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쇄국에서 개방으로 가는 새로운 도전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당시 우리의 힘은 너무 약해 대등하게 협상 할 수 없어 뒤이은 일본의 침략에 무기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미국이 일본의 침략을 제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것은 조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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