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 개방의 물결 (2)

주간시흥 | 기사입력 2016/10/14 [13:19]
주간시흥 기사입력  2016/10/14 [13:19]
한국근대사 - 개방의 물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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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9년 오경석이 사망하자 동갑내기 동지인 유홍기가 그 뒤를 이었다. 유홍기는 박규수에 비해 과격한 인물로 김옥균에게 개화사상에 대한 서적을 제공했으며 유홍기의 소개로 김옥균, 박영효 등과 친분을 맺은 개화승 이동인은 그들의 부탁을 받고 일본에 밀항해 개화사상 책자를 가지고 돌아왔다.

김옥균, 박영효 등이 학자금과 여비 등을 지원해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킨 목적은 만국공법을 익히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동인이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일번에 파견된 건 187911월 이었는데 이는 개화당 설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880년대 개화파들이 모두 한목소리를 낸 것은 아니어서 당시의 집권세력은 온건파는 우리의 도덕성이나 사상은 그대로 지키면서 우리가 부족한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주의였고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의 급진파는 서양의 기술뿐만이 아니라 제도와 사상까지 받아들이자는 것이었다.

18804월 서울에 일본 공사관이 설치되었다. 처음엔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와 그를 수행한 무관. 학생 등 수명에 불과 했고 일본인거주자도 835명에 불과했으나 1년 후에는 3417명으로 늘어났다.

18808월 부산의 관세문제 해결 등의 공식 목적으로 김홍집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개화승 이동인은 수신사로 일본에 온 김홍집 일행과 만나 함께 귀국했는데 이동인이 일본에서 가져온 신사상의 책자는 개화사상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때 같이 가지고 들어온 램프, 석유, 성냥 등을 세도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일제상품이 서울에 들어온 최초가 되었다. 이동인의 소게 이후 석유를 이용한 램프, 호롱 사용이 점차 늘어났으며 성냥도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동인은 곧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에게 소개되었고 이동인은 다시 민영익의 천거로 고종에게 소개되었으며 뛰어난 식견으로 고종을 감복시켜 국왕의 밀사로 중용되어 곧바로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에 파견되어 미국과의 수교 결심을 적은 고종의 밀서를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전달하여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알선을 의뢰했다.

18804월 미구정부로부터 조선과의 수교 임무를 하달 받은 해군 제독 로버트 윌리엄 슈펠트는 대서양과 아프리카 남단과 인도양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는 5월 부산에서 일본영사를 통해 동래부사와의 회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청의 이홍장과 조미조약을 맺기 위한 담판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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